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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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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흔 남자에게 열일곱 소녀가 필요한가

저물녘의 황홀, 불멸의 환상이 없는 노령화 시대가 맞이한 사랑의 정치경제학
등록 2010-04-30 23:13 수정 2020-05-03 04:26
〈은교〉의 표지/ 문학동네 제공

〈은교〉의 표지/ 문학동네 제공

함께 모여 책을 읽다 보면 온갖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의견 일치를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것이 함께 읽는 재미고 묘미다. 그런데 필자가 참가 중인 말 많은 독서클럽(에 서평을 연재한 바 있는 ‘월요일 독서클럽’) 사람들이 아무런 토 달지 않고 “그건, 그래”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친 주제가 하나 있다. 요즘 읽은 50대 이상 남성 작가들이 ‘저물녘의 황홀’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운다는 점이었다. 사랑에 중독된 남성 노년들의 롤리타 신드롬과 마주하면서 이거야말로 분석이 필요한 현상처럼 보였다.

늙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과도하게 수다스러운 살만 루슈디의 , 자기연민으로 들끓는 필립 로스의 , 백발성성한 마르틴 발저의 , 한없이 진지한 존 쿳시의 , 냉소적인 미셸 우얼벡의 , 그리고 박범신의 에 이르기까지 이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 늙은 페르소나들은 국적 불문하고 치명적인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들은 죽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막힌다.

이 작품들에서 노년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안정돼(유명한 시인, 교수, 광고회사 중역, 사진작가, 배우, 금융 최고경영자) 있다. 사회적 지위, 명예, 부, 권력이 있다지만 젊음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가난한 젊음보다 남루하다. 혹은 늙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다. 이 노년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은 ‘늙는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라는 치욕이다. 생산성이 다한 노년은 ‘대학살’의 대상이다. 아무리 의료과학이 발달해도 노년의 몸은 남루를 전시하면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늙은 몸의 언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말을 바꾼다. 무너지는 몸, 성긴 머리카락, 썩어가는 살, 지친 심장, 삐걱거리는 관절, 물렁한 성기, 풀어진 괄약근. 이처럼 부패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끔찍한 현실과 이들은 차마 대면하지 못한다. 그 순간 그들에게 사랑이 찾아든다. 깊은 우물 바닥에 누워서 죽어갈 때 쳐다보는 사막 하늘의 초승달처럼 사랑은 그처럼 푸르고 찬란하다. 삐걱거리는 관절에 꽃잎이 날아와 앉고 굳어가는 핏줄에 환희의 나비가 나풀거린다. 늙은 그들에게 사랑은 대면하기 힘든 죽음과 무의 고통을 감싸주는 진통제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유혹의 얼굴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이 전해주는 따스한 마지막 위로의 말, 그것이 사랑은 아닐까? 그래서 노년의 사랑은 죽어도 아깝지 않다. 사랑,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든 삶이므로.’

누가 노년을 지혜롭다고 했던가? 칠십이면 마음의 욕망을 따라도 넘침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자님이나 할 소리다. 필립 로스의 에서 콜먼(72)은 모든 것을 잃는다. 아테네대학의 학장으로서 명예와 권력도 잃고 평생 충실했던 아내마저 먼저 떠난다.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 남았을 때 콜먼은 대학 내 청소부인 포니아를 만나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세속적 명예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콜먼은 처음으로 암컷을 사랑하는 수컷의 원초적 본능만이 가장 진실한 것이라고 느낀다. 문화적 치장을 전부 걷어낸 콜먼은 중국식 의 전형이다. 둔황의 벽에 그려진 조소에는 늙은 원숭이가 한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성기를 만지면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있다. 식(食)과 색(色)은 이처럼 자연스러운 동물적 욕망이다.

〈슬로우맨〉, 〈에브리맨〉

〈슬로우맨〉, 〈에브리맨〉

열일곱 소녀에게는 열일곱 소년이 있네

마르틴 발저의 에서 괴테(72)는 19살의 울리케에게 빠져서 자신이 젊은 베르테르라고 착각한다. 평생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했던 괴테로서는 온갖 치장을 했음에도 “오늘은, 아름다워 보이네요”라는 울리케의 말에 독하게 상처받는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워 보인다고? 그것도 오늘만?’ 70대에 이르러 사랑의 고통으로 마침내 철이 든 괴테는 사랑 없이도 번식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사랑의 감정이 왜 필요한지 번뇌한다. 번뇌의 결과 괴테는 인간이 고통 없이 사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신의 심술이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을 부여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에서 금융투자가인 카를 역시 70대이고 그 또한 20대의 젊은 여배우에게

빠져 평생 충실하게 축적했던 모든 것을 일시에 잃는다. 존 쿠체의 에서 폴 레이먼트(70)는 자기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장애인이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장애인 남자는 요실금을 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절하고 쓸쓸한 사랑에 빠져든다. 에서 이적요(70) 시인은 자신의 시적 생애 전부를 합친 것이 은교의 사랑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불온한 시대와 투쟁하면서 내걸었던 온갖 명분과 가치는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으며 그가 진정 그리워했던 것은 열일곱 살 소녀의 숨결이자 따스한 온기다.

그렇다면 70대 노년에게 하필이면 왜 열일곱 살의 소녀가 필요한가? 회춘의 양생술인가? 열일곱 소녀의 얼굴에서 순수한 열일곱 소년이던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진 자신의 젊음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한때는 혁명을 꿈꾸었다고는 하나 늙은 그들에게 사회적 원로로서 참견할 자리는 더 이상 없다. 그들이 사라져도 사회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돌아갈 것이다. 사회라는 무대는 더 이상 늙은 배우를 원하지 않는다. 길게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병을 친구 삼고 홀로 늙어가는 것이다. 이런 노년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 어린 시절 아늑한 엄마의 치마폭을 대신하는 소녀의 품속이다.

노년에 이르면 욕망이 줄어들어 평온하기는커녕 불안이 극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틴 발저가 말하는 ‘불안의 꽃’은 나무들도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면 유난히 화려한 꽃을 피워서 자기 흔적을 남기려는 현상을 뜻한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죽을힘을 다해 씨를 뿌리라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고령화 시대를 맞이해 세대 간 회계(Generation Accounting)를 해보자면, 늙은 아버지들은 더 이상 자식의 교육과 양육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자식의 노예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식 세대 또한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지 않는다. 노년의 불안은 이처럼 세대 간 연속성보다는 세대 간 갈등에서 한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개인을 보호해줄 친밀성의 섬으로서 가족은 해체되고 효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노년은 오직 한 줌의 건강과 자기 육체의 감각과 쾌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분노〉, 〈어느 섬의 가능성〉, 〈불안의 꽃〉

〈분노〉, 〈어느 섬의 가능성〉, 〈불안의 꽃〉

노년들이여, ‘카르페 디엠’

우리 시대 노년은 존중받기는커녕 사회적 폐기물이 되고 있다. 세대 간 연속성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약속은 없다. 다음 세대로서의 미래가 없다면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러니 노년들이여, 그냥 오늘을 즐겨라. 욕망을 극대화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그들은 피를 걸러내고 심장을 갈고 주름을 당기고 치아를 심고 가발을 쓰고 젊은 척 사랑하며 남김없이 소비하다가 후회 없이 죽으려 한다.

노년을 폐기물로 만들자 황혼의 반란이 시작된다. 탐욕스러운 늙은 아버지는 아들 세대의 여자까지 자신의 몫으로 챙기고 자기 당대에 모든 욕망을 소진시키는 것으로 보복한다. 에서 천재성이 번뜩였고 그것이 신성(神性)과 시성(詩性)으로 맞닿아 있던 이적요 시인은 무능하고 의존적인 문학적 아들 서지우에게 자신의 미래를 부탁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비루한 신이 된다. 미래의 약속이 없는 시대에 이르면 아들이 ‘살부’(殺父) 충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살자’(殺子) 충동을 느끼고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처럼 아들을 잡아먹는다. 길게 늘어난 삶에서 사랑의 불씨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노년은 감당하기 힘든 탐욕에 지친다. 지쳐서 죽을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재생산의 약속과 연속성의 환상이 없는 고령화 시대가 보여주는 사랑의 정치 경제학이다.

임옥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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