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운하 물길이 가로세로로 이어지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프리슬란에는 세계 유일의 건축물이 있다. 강물 위에 둥실 떠 있는 하얀 통처럼 생긴 집이다.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 같기도 하고, 길쭉한 이글루 같기도 하다. 이름마저 ‘프리슬란 방주’.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어서 배에 달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다.
설명만 들으면 참 독특해 보이지만 그냥 커다란 빈 공간 구조물 하나를 물 위에 띄운 것일 뿐이다.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이런 건물을 만든 것일까?
이 동네가 이 요상한 건물을 구상한 것은 무려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지역 건축위원회에서 마을에 필요한 건축과 조경 문제에 대해 논의할 공간, 새로운 마을 가꾸기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전시할 공간, 주민들이 토론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모를 통해 저 방주 건물을 뽑아 드디어 완성한 것이 지난해. 배처럼 떠다니는 것은 물길로 서로 통하는 주변 마을들을 연결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 크지 않은 변두리 건물이 돋보이는 이유는 작은 마을에서, 지역 주민들이 토론할 공간을, 그것도 지역에 맞는 건축과 조경 환경이란 주제를 이야기할 공간으로 마련했다는 점일 것이다. 10년이나 걸린 건물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더 지방자치의 역사와 풍토가 강한 네덜란드다운 건축물이자 네덜란드가 왜 세계 건축을 이끄는 건축 최강국인지, 네덜란드란 나라가 건축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보여주는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저 프리슬란의 방주 같은 지역 공동체 건물은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데도 가장 부족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면사무소, 동사무소 등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직접 뜻을 모아 만드는 공동체 건물,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공동체 건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가 원래는 저런 공동체 건축이 가장 발달했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현실은 더욱 아쉬움이 크다. 우리 전통건축 중에서 특히 발전했던 분야가 바로 정자였다. 이 정자가 바로 주민들의 소통 중심인 커뮤니티센터였다.
흔히 정자는 경치 좋은 곳에 세워 주변 풍경을 정원처럼 즐기는 한국적 조경 개념을 보여주는 풍류용 건축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정자 중에는 농민인 주민들을 위한 정자도 있었다. 양반들이 시 읊고 술 마시던 기와집 정자와 달리 이런 정자들은 초가지붕을 얹어 ‘모정’이라고 부르는 소박한 정자였다. 일터인 농지와 마을의 경계지점에 주로 세웠던 주민 모두의 휴식 공간이자 마을 현안을 논의하는 토론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젠 한국 고유의 공동체 건물들이었던 이런 모정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현대판 정자 건축에 대한 시도는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사례가 없을까?
한옥 알리기에 앞장서온 재단 ‘아름지기’가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이 그 비슷한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통 마을 어귀마다 있기 마련인 정자나무는 나무 자체가 정자 기능을 한다. 커뮤니티센터 개념의 정자 중에서 건축적으로 최소화한 정자, 곧 최고의 미니멀리즘 정자가 그늘 아래에서 쉬기 좋고 이야기하기 좋은 커다란 정자나무들이었다. 나무 자체가 건축물이 되는 한국적 건축물, 자연 그 자체를 활용하는 최고의 친환경 건축인 셈이다.
정자나무 가꾸기는 한때 마을의 중심이었던 200년 넘은 큰 나무 주변을 주민들이 모이기 좋게 의자도 놔주고 조경도 해서 꾸며주는 지원사업이다. 주민들 스스로 시도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 한계였지만, 이제는 공모사업으로 바뀌면서 관심과 지원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자가 사라진 요즘 정자나무들이 되살아날지, 한국판 프리슬란의 방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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