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창덕궁 옆, 계동 현대 사옥에 바로 붙어 있는 독특한 건물이 있다. 검정 벽돌 건물, 전체가 유리인 건물 그리고 그 사이 한옥 한 채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건물이다. 흔히 ‘공간 사옥’이라 불리는, 건축설계회사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건물이다.
덩치가 대단한 현대 사옥과 과자 ‘웨하스’처럼 생긴 이 공간 사옥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게 이웃한 모습은 좀 묘하다. 박정희 시대 건설의 상징과 건축의 상징이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1915~2001)의 현대가 개발독재기 한국 건설을 상징한다면, 20세기 최고의 스타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세운 공간은 같은 시기 한국 건축을 상징한다.
현대 사옥은 뭐든지 남들보다 큰 그림을 그렸던 정주영처럼 크고 압도적이다. 공간 사옥은 벽돌로 시를 쓰듯 건축을 했다는 김수근 건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건물 크기에선 공간 사옥은 현대 사옥에 견주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미학적 평가에선 현대 사옥은 감히 공간 사옥에 비교 대상이 못 된다.
공간 사옥은 김수근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1998년 건축전문가들이 꼽은 대한민국 50년 최고 건물 1위가 공간 사옥이었다. 이 건물엔 다른 건물엔 없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김수근이 작고한 뒤 2대 대표로 공간을 이끈 장세양(1947~96)은 선배의 벽돌 건물 옆에 유리 건물을 지어 이었다. 선후배 건축가의 작품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 새로운 작품으로 진화했다.
회사 사무실이어서 일반인들에겐 공개가 안 되는 이 공간 사옥은 그 안을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내부 공간을 어찌나 알뜰살뜰 활용하는지 과하다 싶을 정도다. 어느 한구석 무의미하게 남겨놓지 않고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낸 김수근의 감각과 정성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회의실들’이었다. 김수근의 벽돌 건물에는 6인용 식탁만 한 책상이 놓인 작은 회의실이 있다. 작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벽돌 벽에 따사롭게 비치는 아늑한 다락방 같은 곳이다. 탁자 옆엔 나무 상자 위에 나무판을 올려 만든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방주인의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듯한, 이 책상과 방의 주인이 바로 고 김수근이다. 김수근은 떠났지만 그의 방은 회의실 겸 휴게 공간이 되어 그가 일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벽돌 건물 옆 유리 건물에도 회의실이 있다. 건물 뼈대와 같은 재질인 맨살 콘크리트로 만든 책상이 있는 회의실이다. 그 옆에는 장세양을 그린 화려하지 않은 철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고 장세양을 기리는 기념 공간 겸용 회의실이다.
이 두 사무실에서 김수근과 장세양의 후예들은 커피를 마시고, 손님을 만나며, 건축을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두 선배는 감히 범접 못할 초인이 아니라 그들처럼 고민하고 일했던 건축가로 자연스럽게 후배들과 만난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를 개척한 대표자에 대한 기념과 추모는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건축계가 고 김수근을 대하는 분위기는 거의 숭상에 가까울 만큼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김수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하지만 김수근의 공간사무소 사람들이 그의 방을 회의실로 만들어 기념하는 방식에는 잔잔하면서도 울림 큰 감동을 받았다.
공간 사옥의 두 회의실은 ‘기념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진정한 기념은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김수근의 후배들은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공간 사옥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글·사진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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