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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속 경찰의 진화

외국 추리·스릴러물에서는 조롱의 대상에서 점차 주인공으로 변해왔지만 한국에선 그런 기대조차 어려운 게 현실
등록 2009-08-06 14:26 수정 2020-05-03 04:25

문학과 가장 밀접한 직업은? 뜻밖에도 경찰이다. 추리소설이 등장하고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개념이 넓어지고, ‘범죄’를 다루는 거대한 장르가 만들어지면서 범죄를 해결하는 주체인 경찰은 이 장르와 한 몸이 됐다. 문학 장르 하나를 자기만의 것으로 거느린 직업이 또 있겠는가.

과학수사대 〈CSI〉

과학수사대 〈CSI〉

그러나 그 출발은 결코 산뜻하지 않았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역사는 경찰을 조롱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직업의 특성상 경찰은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1세대 작가들은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으로 탐정들을 내세워 경찰을 깔아뭉갰다.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 작가로 꼽히는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의 에서 르루주 부인을 죽인 범인을 밝혀내는 주인공은 경찰이 아니라 아마추어 탐정 타바레 신부였다. 에드거 앨런 포도, 코넌 도일도 경찰이 아니라 탐정을 주인공 삼았다. 일본 범죄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도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통해 경찰을 비웃었다. 경찰력을 중앙집권의 주요한 통치 수단으로 써서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더욱 컸던 프랑스에선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다. 경찰을 가지고 노는 도둑을 내세운 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찰에 대한 인식이 19세기보다 훨씬 나아진 20세기에도 추리소설과 수사 드라마들은 ‘경찰 놀리기’ 전통을 충실히 이어갔다. 1970~80년대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변호사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대표적인 경찰 킬러였다. 얼 스탠리 가드너가 만들어낸 주인공 페리 메이슨은 형사 전문 변호사로, 항상 자기 의뢰인이 죄가 없는데 경찰과 검사가 잘못 잡아넣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무려 85편이나 썼고, 매번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미국 경찰에겐 내내 악몽이었다. 이 시리즈가 로스앤젤레스 시경(LAPD)에 대한 시민들의 근본적인 불신 풍조를 낳았고, 훗날 ‘OJ 심슨 사건’ 수사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한편에선 경찰을 추리 미스터리의 새로운 영웅으로 조명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탐정이란 직종이 워낙 비현실적이었기에 더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미스터리를 구현하기 위해 경찰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문이나 위협을 통한 자백 받아내기 위주였던 경찰 수사가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로 바뀐 현실을 반영하는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했다.

에드 맥베인은 경찰이 팀워크를 바탕으로 집요하게 범죄자를 추적하는 소설 ‘87분서’ 시리즈를 만들어냈고, 엘러리 퀸은 같은 이름의 명탕점 엘러리 퀸에게 경찰 정신의 화신이랄 수 있는 아버지 퀸 경감을 파트너로 붙여줬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런 경향이 더욱 거셌다.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은 수사 드라마 은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난도질당한 LA 경찰을 달래주며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시켜줬다. 이 드라마의 주연이자 작가였던 잭 웹이 사망했을 때는 LA 경찰이 조기를 걸었고, 극중 수사관 번호를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경찰이 대중문화의 가장 주요한 주인공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과학수사대 〈CSI〉(사진)의 그리섬 반장 같은 경찰 주인공들이 우리 시대의 셜록 홈스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추리 스릴러 장르의 역사는 경찰이 극중에서 수모와 조롱을 딛고 주인공으로 이미지를 개선해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추리 미스터리 작품 속 경찰들은 어떨까? 과거에는 오히려 명경찰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드라마 이 있었고, 한국 추리소설의 지존 격인 김성종의 ‘오병호 형사’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추리 미스터리 문학계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며 그 존재감조차 사라져버리면서 경찰 캐릭터들도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야말로 바닥을 기고 있는 한국 추리 미스터리 장르가 살아나려면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경찰 캐릭터들이 등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같아선 이런 기대조차 힘들게 됐다. 원래 더 이상 이미지가 나빠지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인기가 없던 한국 경찰이 현 정권이 들어선 뒤 대중의 예상을 비웃으며 자기 이미지를 과연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작가들이 아무리 멋진 한국의 경찰 영웅을 창조해내도 현실 속 경찰과 너무나 달라 독자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추리 미스터리 장르는 참 지지리도 꼬이기만 한다.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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