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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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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도 낙하산 시대

지난해 말 계획 나오고는 10월에 세종대왕 동상 제막 예정…
광장 의미와 시민 바람 다 생략하고 퇴행도 이런 퇴행이 없네
등록 2009-05-19 13:26 수정 2020-05-03 04:25
세종대왕 동상. 사진 서울특별시 제공

세종대왕 동상. 사진 서울특별시 제공

오는 10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4월16일 세종대왕 동상 당선작을 발표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쪽에 11.5m 높이 돌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옥좌에 앉은 5m짜리 세종대왕 동상을 올린다.

이 동상은 서울시가 새로 조성하는 광화문 광장 모습을 발표한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 연말 광화문 광장에 새 동상을 만들면 누가 좋겠냐는 이야기가 잠깐 나오더니 곧바로 올 1월 세종대왕 동상을 세운다고 발표했다. 그 다음달 동상을 만들 후보 작가들이 지정됐고, 두 달 뒤 당선작이 발표됐다. 앞으로 다섯 달 뒤에는 동상이 제막된다.

600년 도시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문화의 상징 공간이 광화문이란 걸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국가대표 공간에 들어설 국가대표 동상이 이리 쉽게 결정되고 이리 빨리 만들어진다. 광화문 광장에는 어떤 상징이 필요한가? 상징으로 동상은 적합한가? 동상을 세운다면 누구 동상일까? 그리고 어떤 모양이 좋을까? 평생 동상을 볼 시민들에겐 얼마나 충분히 알리고 의견을 들어야 할까? 이 모든 질문이 빠져버렸다. 그 결과 놀랍도록 시대착오적인 동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들어선다. 분명 정상이 아니다.

뉴욕시는 지난해 10월 공연의 메카 브로드웨이 부근 타임스스퀘어에 공연 티켓 할인 매표소인 TKTS 부스를 새로 지었다. 불과 높이 5m짜리 이 작은 건물이 완공되자마자 뉴욕을 대표하는 명물이 됐다. 건물 뒷면을 공연장의 레드카펫 모양의 붉은 계단으로 꾸민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빌딩숲 속 이 작은 쉼터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은 배우처럼 레드카펫을 밟는 기분을 내며 걸터앉아 뉴욕의 정취를 즐긴다.

이 매표소 하나 짓는 데 뉴욕시가 들인 시간이 8년이다. 새로운 가치를 담는 매표소를 만들기 위해 전세계 공모를 했다. 수백여 응모작에서 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 건축가 존 최의 작품을 골랐고, 건물 전체를 유리로 짓는 아이디어를 공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차근차근 일을 풀어갔다. 덕분에 매표소도 건축 명품이 됐다.

세종대왕 동상은 어떤가? 서울시장은 입만 열면 문화와 디자인으로 도시 경쟁력을 높인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국가적 문화 아이콘이라는 이 동상을 만드는 데 서울시가 들이는 노력과 정성은 뉴욕의 매표소 공사보다도 덜 치열해 보인다.

더 웃기고 그래서 더 슬픈 것은 세종대왕 동상의 모양을 저런 것으로 고르는 관계자들의 취향과 수준이다. 동상은 서양에서 민족국가들이 탄생하던 18~19세기 보편화됐다. 신생 민족국가들은 국가라는 새 공동체의 통합과 국민의 복종을 이끌어내려고 국가적 상징으로 황제나 장군들의 동상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높은 좌대에 앉아 백성을 내려다보며 군림하는 동상들이었다.

그러나 권위주의 시대에서 시민사회 시대로 바뀐 요즘에는 동상들도 바뀌고 있다. 높은 좌대에 앉았던 동상들이 광장 아래로 내려와 시민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며 소통을 지향한다. 동상 주인공도 위대한 초인에서 시민 대중들 자신으로 바뀌는 추세다.

세종대왕 동상은 완전히 거꾸로다. 동상들이 시민 곁으로 내려오는 시대에 다시 높은 권좌 위로 올라가 앉는다.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한 세종대왕을 기린다는 서울시의 설명과도 정반대된다. 퇴행도 이런 퇴행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퇴행을 퇴행으로 보지 않는 서울시다. 서울시는 결코 그렇지 않다며 증거를 댈 것이다. 동상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여론조사도 하고 동상 후보작을 심사위원회에서 선정하는 과정을 다 거쳤다고 할 거다. 거기에는 분명 그들이 제도라고 부르는 것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도 결과는 퇴행 그 자체다. 왜 그런가? 동상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식이 퇴행했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알리고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공공 공간인 광화문 광장에 동상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그 동상이 시민들의 문화 면역력까지 퇴행시킬 것은 뻔하다. 그런데 나서서 비판하는 전문가도 거의 없다. 비판할 틈조차 없었던 탓이다.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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