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하나 생겼다. 상상으로 해보는 재판 놀이다. 아주 간단하다. 스스로 판사가 되어 판결을 내리는 거다. 물론 완전히 내 맘대로. 어허, 정말 못된 짓을 하셨군요. 도대체 뭘 믿고 이따위로 하신 건가요? 벌 좀 받으시죠, 땅땅땅. 이러고 놀면 된다.
이 재판 놀이는 한 디자이너에게 배웠다.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디자이너인데, 내 취미가 ‘거리 가구’(스트리트 퍼니처·거리의 각종 공공시설물들)를 들여다보고 사진 찍는 것이어서 가끔 만나 디자인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런데 둘이 만나면 늘 마지막에는 같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힘이 쪽 빠진 채로 헤어지는 법칙이 있다. 디자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 공공미술과 디자인 현실을 싫어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어서다. 아직도 디자인계의 최신 흐름과는 기가 막히도록 정확하게 정반대인 작품만 척척 골라내는 관의 놀라운 결정력, 그런 관의 취향에 맞게 알아서 시대착오적 작품을 내는 작가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례들을 만들어주시는 탓이다.
그래서 매번 이런 이야기가 오간다. 어느 동네 가보셨나요, 세상에 마늘이 특산물이라고 가로등을 육쪽마늘 모양으로 만들었더군요.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항구도시 어디에는 가로등에 돌고래와 가오리가 달렸던데요. 전통문화 거리라는 어디에서는 기념 조형물로 커다란 붓을 만들어 붓글씨를 쓰고 있습디다. 허허, 지자체들이란. 어떤 도시는 시 로고를 삼성그룹 로고와 현대그룹 로고를 합쳐서 만들었더라고요.
지난번 만났을 때도 결국 이런 이야기로 둘 다 속상함 지수가 높아져가는데, 문득 디자이너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문화에도 재판이 있으면 그런 짓을 못할 텐데….”
문화재판이라, 재미있겠다 싶었다. 우리 문화 발전에 저해가 되는 나쁜 선례나 오점을 남긴 사람이나 작품을 법정에 세워서 벌을 준다면? 맞장구를 치고 누구부터 재판할까 한참 떠들었다. 그 뒤로 황당한 문화계 뉴스를 보거나 경악하게 만드는 공공조형물 등을 보면 혼자서 문화재판을 해보곤 한다.
이 재판 놀이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내 맘에 안 드니까 유죄! 라는 식은 아니된다는 거다. 법이란 공정하고 과학적이며 가장 합리적이어야 하니까. 정말 괴상하고 황당한 것이라도 그게 한 개인이 혼자 즐기는 것, 그래서 남들에게 피해를 안 주면 그건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관련되는 것, 특히 공공적 성격인 것에서 문화적으로 황당한 게 있으면 가차 없이 마음속에서나마 응징하는 거다.
이 놀이의 하이라이트는 처벌 내용을 독창적으로 결정하는 순간이다. ‘죄형내맘대로주의’여도 처벌에는 의미와 원칙이 있어야 하니까, 반문화적 행위자들을 문화적으로 만들게 하는 문화적 처벌을 궁리해내는 것인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가령 이런 피고인들, 어떤 판결을 내려줘야 할까?
먼저 나비축제 고장이라고 함평에 가요 노래탑을 정말로 세워버리신 분들. 그 건립 결정 자체도 놀라운데, 디자인 또한 놀랍도록 저차원적인 것을 골라 보는 사람들의 문화적 상상력까지 저하될 듯한 충격을 줬다. 나비들을 위해 꽃 1만 송이를 심으라고 할까, 나비축제 내내 누드 퍼포먼스라도 하라고 시킬까?
더 어려운 피고인. 관광객을 불러모을 문화유산이 없다고 식민지 시절 일본 건물 모양으로 거리를 꾸민 인천 중구청 분들. 결핍된 역사의식이야 가르쳐 주입시킬 수라도 있겠지만, 당시 건물 모양에 대한 자료도 없는데 고증도 안 하고 대강 만든 짝퉁으로 건축 문화를 위조하는 만행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반문화적 아이템을 구상하는 상상력이 문화적 상상력을 가뿐히 초월한다. 이런 분들을 문화적으로 만들 좋은 방법, 여러분은 쉽게 떠오르시나요? 문화재판 놀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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