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도쿄역 근처 빌딩숲에서 쏟아져나오는 직장인들의 물결 속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총총걸음으로 백화점으로 향하는 ‘OL’(Office Lady·주로 사무직 직장여성을 칭하는 말)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녀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데파치카’(‘Department Store 지하’의 준말)라 불리는 백화점 지하 1층의 식품 코너.
백화점 명가 요리점들이 저마다 솜씨를 뽐내 만든 각양각색의 고급 도시락(점심시간엔 엄선된 소재의 양질 요리를 특별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이 즐비하게 늘어선 벤토(도시락) 코너에서 직장인들이 분주히 도시락을 고른다. 그곳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알록달록 화려한 스위츠(Sweets·) 전문점들이 펼쳐진다. 스위츠 코너에서도 OL 언니들이 눈을 빛내며 디저트를 고른다. 점심시간 데파치카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스위츠에 대한 그녀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근처 백화점까지 걸어가 스위츠 코너를 둘러보는 그 묘미란! 계절별 한정 스위츠와 전국 각지에서 새로 태어난 이름 모를 화과자·양과자들이 모양새도 예쁘게 진열장 안에 앉아 있는 걸 보노라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때 그녀들은 생각한다. “그래,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야.”
고급 브랜드나 액세서리까지는 안 되더라도, 이 달콤하고 작은 보석(케이크·초콜릿·생과자 등) 한 조각이 지치고 움츠러든 그녀들의 표정과 마음까지도 활짝 펴주는 힘을 발휘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과중한 업무, 복잡한 사내 인간관계, 공사 불문하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스트레스 등이 스위츠를 한 조각 입에 넣는 순간 잠시나마 사라져 그녀들을 해방시켜준다. 진열장들을 보고만 있어도 눈도 즐겁고 마음도 즐겁다.
퇴근 시간, 또 한 번 데파치카 피크타임이 찾아온다. 망설이기만 하다 점심시간을 보내버려 ‘불완전연소’ 상태인 OL 언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퇴근 뒤 총총걸음으로 다시 데파치카를 찾아온다. 이제 느긋하게 보물찾기 시작이다. 퇴근 뒤엔 마음까지 여유로워진다. “가끔은 가족에게 맛있는 생케이크를 사다줘야지” “주말에 만나는 친구에게 이 초콜릿을 선물할까” “시골의 할머니에게 계절 한정 양갱을 보내드릴까”. 갑자기 선심이 팍팍 생겨나니 여기저기서 그녀들의 지갑이 열린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이 보물들을 받고 기뻐하는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은 왠지 훈훈해진다.
남들이 아직 모르는 유명 파티시에의 뜨끈뜨끈한 신제품을, 나는 누구보다도 빨리 손에 넣었다는 우월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보물찾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다. 끝이 안 보이니까 매일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 모든 힘이, 오늘도 이 거리 저 거리의 백화점 지하층으로 자연스레 그녀들을 걸어가게 만들고 있다.
김기은 회사원
*‘세 여자의 오이시 도쿄’는 도쿄에 살고 있는 ‘세 여자’가 돌아가며 격주로 연재합니다. 도쿄 생활 13년차 회사원 김기은씨, 도쿄 생활 5년차 모델 하혜나씨, 의 저자 우에다 사치코가 ‘맛있는 일본’으로 안내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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