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말하기 전에 미리 기억해둘 세 명의 학자가 있다. 한국의 독자들이 사후 63년 만에 케인스를 ‘제대로’ 만나게 되기까지 이들의 구실이 결정적이었으므로.
학계에서 박상훈은 ‘리틀 최장집’으로 통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학문적 적자 가운데 한 명이다. ‘포스트 최장집’이 되는 일만 남았다고 다들 생각했지만, 2007년 말 홀연 강단을 떠나 후마니타스출판사의 대표를 맡았다. “노사관계·소유구조·경영방식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게 이 출판사의 모토다.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질서를 구축하고 외부적으로는 상업적 이윤만을 좇는 한국 출판계에서 후마니타스는 새로운 이정표다. 독자들에겐 확실한 품질보증 마크다. 헙수룩한 책을 도대체 펴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페이비언협회’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그 상석은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에겐 둥근 얼굴과 쌍꺼풀진 눈이 만들어내는 남방계의 미소가 있는데, 어쩐 일인지 그 행보에는 남방계의 다혈질 대신 대륙적인 일관됨과 꾸준함이 있다. 등을 저술·번역했다. 영국 노동당 정치의 한국적 함의를 줄기차게 파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 투성이의 한국 지성계는 그로 말미암아 영국식 사회복지 패러다임에 대한 관심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 케인스 전기를 번역할 적임자를 달리 찾기도 힘들다.
그리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지은이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있다. 그를 설명하려면 또 한 권의 전기가 필요할 것이다. 옥스퍼드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영국 사민당의 창당 멤버다. 1992년 사민당이 해체된 뒤 보수당 상원의원이 됐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폭격을 반대하면서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은 끝에 2001년 탈당했다. 현재는 무소속 상원의원이다. 에드먼드 버크에게서 비롯한 ‘영국적 보수주의’ 전통에는 민중을 불신하는 엘리트주의와 함께 엘리트의 공공적 책무에 대한 유별난 강조가 깃들어 있는데, 스키델스키는 살아 있는 그 체현자다.
그러니까 에는 전통적 좌파와 우파를 동시에 경계하는 태도가 두루 녹아 있다. 출판기획자 박상훈은 전투적 계급주의가 아니라 노·사·정 합의·협치에 국가가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코포라티즘의 세례를 받았다. 정치학자 고세훈은 민중의 급진적 혁명이 아니라 지식인 중심의 점진적 사회주의 모델에 애착을 갖고 있다. 스키델스키는 자본의 탐욕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증진하는 엘리트의 책무에 대한 역사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이들이 한국 독자들 앞에서 삼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곳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중도의 거인’ 케인스가 있다. 좌파와 우파의 적대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케인스를 ‘묻어버리려’ 했음에도, 케인스는 20세기를 통틀어 한 번도 학문과 역사의 현장에서 퇴장한 적이 없다. 2008년 은 ‘올해의 인물’로 케인스를 꼽아 표지에 등장시켰다. 세계 경제위기는 케인스의 재발견에 힘을 보태고 있다.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를 거친 20세기 경제사는 케인스의 중간 지대에서 21세기 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다.
케인스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에 대한 주목에서 출발한다. 경제주체로서의 인간 행위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기초한다. 시장은 본래적으로 불안정하다. 불안은 안전에 대한 보증의 욕망을 부른다. 화폐는 ‘사용’되지 않고 (금고 속에) ‘저장’된다. 이는 고용과 산출을 요동치게 만든다. 이를 조절하는 역할이 정부에 있다. “국가의 주된 경제적 의무는 (불확실성이 낳은) 그런 결과물을 화폐정책과 자본지출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다. 재정정책을 통해 시장을 조정하는 국가의 개입주의가 케인스주의의 요체다.
제3의 길, 그리고 즉각적인 현실 개선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경제이론가를 떠받치는 철학자·정치가의 면모에 주목한 데 있다. 케인스는 뼛속 깊이 엘리트를 신뢰했으며, 그 자신이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를 거친 최고의 엘리트였다. 케인스는 노동계급과 그 이념인 사회주의를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조차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계급전쟁이 일어난다면 나는 교육받은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나는 중간계급, 심지어는 상층계급이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동시에 그는 보수주의와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 경제적 번영은 너무나 중요해서 자유방임에 맡길 수 없다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개인 간 계약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을 교정하는 국가의 재량권에 의해서만 온전히 보존될 수 있다.” 심지어는 자본주의에 내장된 탐욕도 증오했다. “내가 주조하고자 하는 사회는 기존의 불평등과 불평등의 원인들이 대부분 해소된 사회”라거나 “대부분의 결핍이 충족되면 돈에 대한 사랑은 혐오스런 병적 집착으로 인식될 것이고, 그때 인간은 수단보다는 목적을, 효용보다는 선함에 가치를 두게 될 것”이라는 언명에 이르러 케인스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에 손을 내민다.
스키델스키는 그런 케인스를 이렇게 평했다. “케인스의 중도를 우와 좌의 타협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양쪽 전통 모두에 낯선 새로운 사상들이 담겨 있다. 오늘날이었다면 ‘제3의 길’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케인스가 평생 고심한 것은 이론의 줄타기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신속한 개선이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많은 시간이 흐르면 바다는 다시 평온해진다는 말만 들려준다면, 경제학자들은 너무나 안이하고 쓸모없는 일만 하는 것이다.”
스키델스키도 ‘안이하고 쓸모없는’ 책을 낼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활발한 동성애자였으며 애틋한 남편이었고, 고급 문화를 사랑하며 학자·언론인·정치가로 종횡무진했던 케인스의 일생을 문학적 필치로 엮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국의 케인스 또는 한국의 스키델스키가 없는 현실을 사무치게 아쉬워할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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