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도되었다. 쓰촨성 지진광물국과 미 컬럼비아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쓰촨성이 지진 다발지역이긴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지진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수력발전용 댐에 가두어진 엄청난 무게의 물이 지하 단층에 압력을 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고정적 근대성의 필연적 귀결
지진대에 400개에 이르는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런 추측을 진화하기 위해 부심하면서 쓰촨성 지진의 연구자료에 대한 접근도 차단하고 나섰다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조사와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또 다른 지진 피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댐을 건설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적 계산능력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은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의 한 양상이다. 최근에 나온 (산책자 펴냄)는 그의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시리즈의 하나인데,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해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의 양상은 물론 단단한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과 대비된다. 바우만의 통찰은 ‘유동적 근대성’을 ‘고정적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이면서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데 있다.
(2002)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서 바우만은 근대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에서 찾는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재난은 당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자비한 자연의 재앙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섭리는 도저히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죄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이었지만 “이 피할 수 없는 충격에는 무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이 희생되었다”(볼테르).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 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엔 자연을 신의 섭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탈주술화’를 가져왔다. 자연에서 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탈주술화됐다 하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도 대신에 과학과 기술을 새로운 대응책으로 선택한 근대인은 도덕적 악이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악도 이성에 의해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기획이자 견고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바우만이 보기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재해는 ‘원칙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거꾸로 도덕적 비리가 ‘고전적인’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기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소련의 강제수용소),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이 유동적 공포에도 차별이 있다는 점.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분명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재해가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카트리나가 덮치기 이전에 법질서에 버림받고 근대화에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미리 고려해서인지 연방정부는 홍수 대비 예산을 마구 삭감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늑장 출동한 주 방위군은 구호활동에 나서기보다는 ‘법질서’ 유지에 더 주력했다.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두 가지 모토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배려할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그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란 지속될 수도, 보편화될 수도 없는 근대화와 세계화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바우만의 예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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