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많은 거장 로렌스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시선집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노래도 시다. 한때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라고 목 놓은 적 있었다. 헉! 목숨 바친 뒤엔 어떻게 사랑하라고? 지나치게 비장하다. 비장미를 좋아하는 족속은 따로 있는 법이다. 시인은 말한다. 혁명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라고.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말란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말란다. 차라리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란다. 왜?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혁명’이라면 이쯤은 돼야 하리라.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영미문학의 거장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시선집 (류점석 옮김, 아우라 펴냄, 1만4천원)이 번역돼 나왔다. 시인보다는 소설가로 잘 알려진 로렌스가 남긴 1천여 편의 시 가운데 152편을 추려 실었다. 흔히 로렌스를 ‘사랑과 저항의 시인’이라 부르는데, 그동안 우리는 주로 ‘사랑’ 쪽에 관심을 가져온 듯싶다. 다섯 부분으로 나뉜 이 책 ‘제4부 우리의 날은 저물고’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는 시편들은 ‘저항시인’ 로렌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흡사 1980년대 한국의 노동문학을 읽는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마저 간간이 눈에 띈다.
“이 순간의 시가 있다”
“노동의 댓가는 현금/ 현금의 댓가는 더 많은 현금/ 더 많은 현금의 댓가는 악의에 찬 경쟁/ 악의에 찬 경쟁의 댓가는-우리가 사는 세상/ …/ 임금을 버는 행위는 감옥살이와 같은 것/ 그리하여 임금노동자는 일종의 죄수/ 월급을 받는 행위는 간수의 직업/ 죄수라기보다는 간수의 일….”(‘임금’ 중에서)
“돈을 없애라, 더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하라/ 돈이란 비꼬인 본능, 숨겨진 생각이다/ 돈은 뇌, 피, 뼈, 돌, 영혼을 썩게 한다/ …/ 모든 개인은 새처럼 공짜로 자신의 집과 음식, 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돈을 없애라’ 중에서)
“부르주아가 이토록 추하다니/ 특히 이 족속의 수컷들이-/ …/ 제 딴에는 버섯처럼 말쑥하게 차려입고/ 호리하게 곧추서서 허세부리며-/ 자기보다 더 위대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다/ …/ 끓고, 벌레가 파먹고, 그래서 맹탕의 감정들만이 득실거려/ 참으로 욕지기나는 꼴-/ 부르주아가 이토록 추하다니!….” (‘부르주아가 이토록 추하다니’ 중에서)
1885년 영국 노팅엄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렌스는 1930년 마흔네 살 나이에 프랑스 방스의 허름한 요양원에서 결핵으로 삶을 마감했다. 길지 않은 그의 개인사는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만큼이나 논쟁적이다. 6살 연상이던 대학 은사의 부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져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올라 유럽을 전전했고, 도발적인 필체로 오랜 세월 검열과 갖은 핍박을 감내해야 했다. 1차대전 당시 은둔생활을 하던 프랑스에선 영국 스파이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 시절을 일러 ‘야만적 순례’ 기간이라고 불렀다.
쓸쓸히 죽음을 맞은 뒤에도 세상은 그에게 ‘포르노물에 재능을 낭비한 멍청이’란 비난과 ‘상상력 넘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소설가’란 상찬을 동시에 안겼다. 정작 로렌스는 책 말미에 실린 ‘현재의 시’에서 자신의 시론을 이렇게 편다.
“다른 종류의 시가 있다. 목전에서 전개되는 것, 즉각적인 현재를 노래하는 시 말이다. 즉각적인 현재에는 어떤 완벽성도, 어떤 완성된 것도, 어떤 완결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오라기들은 날리고 뒤틀리고 내적으로 꼬여서 직물이 된다.… 즉,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의 시일 뿐만 아니라 이 순간의 시가 있다. 구현된 지금을 노래하는 소용돌이 치는 시야말로, 이전과 이후에 늘 존재하는, 보석을 능가하는 최고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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