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빛 아오모리, 덧없는 물방울, 그리고 형광낙엽… 가을에 듣는 네 개의 추천앨범
▣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
가을이다. 어김없이 귀뚜라미가 운다. 아니, 사실 날씨로 치자면 아직 가을은 아니다. 여름의 긴 터널 끝에 작은 원을 그린 흰 빛이 있지만 좀처럼 그 원주는 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귀뚜라미가 운다. 그러니 마음은, 그 소리로 인해 가을이다.
새벽, 담벼락에서 울리는, 꿈결 속의 내 머리맡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에 듣는 첫 음악이다. 여름내 쟁쟁하던 매미의 노래는 축축하고 울창했지만, 귀뚜라미의 그것은 드라이하고 앙상하다. 멜로디의 각질들이 자세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매미의 노랫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음색이라면 귀뚜라미의 그건 스트링 콰르테트, 즉 현악 4중주의 음색이다. 자, 거기서부터다. 가을에 다가온 어떤 트렌드도 드라이함을 노래한다. 왠지 샹송이 어울린다.
드라이하고 치열하다, 쿨하면서 들떠 있다
카미유(Camille), (le Fil)
2006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던 카미유. 이 언니의 노래가 여전히 프랑스 가요의 트렌드 맨 앞줄에 서 있다. 프랑스 말로 ‘필’은 실이라는 뜻이다. 음반 재킷에 보면 실이 한 오라기 지나간다. 재킷 안쪽을 펼쳐봐도 그 실은 계속 지나간다. 한 오라기 실. 뜻밖에도 음악 속에도 그 실은 지나간다. 이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에 상관없이, 하나의 음이 지속된다. 그 음은 방해가 되기도 하고 화음이 되기도 하면서 첫 트랙부터 끝 트랙까지 모든 노래를 실로 꿴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한 오라기 실에 끼워진 노래 조가비가 되도록 한다. 카미유는 젊은 싱어송 라이터. 노래들은 조용하고 드라이하지만 치열하다. 자기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쿨하지만 들떠 있다. 쿨한 것은 의식이고 들떠 있는 건 역설적으로 의식의 밑바닥이다. 쿨한 노래들이 자기도 모르게 열을 낸다. 떠든다. 귀뚜라미들처럼 자기도 모르게 들떠서 드라이하게 떠든다. 그러나 여전히 쿨하다. 프로듀스의 힘이다. 여백을 만들고 힙합이나 포크 같은 상반된 스타일들을 매치시킨다. 노래를 부르는 카미유의 볼은 발갛게 상기돼 있지만, 목소리의, 그리고 노래들의 톤은 샐러드 색깔이다. 연둣빛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가을이 시작되려 하는데 여전히 녹색 천지다. 녹색의 가을. 온실효과 속의 지구 북반부 온대지방의 새로운 경향이라고나 할까. 브라운은 늦가을-겨울의 색깔로 미뤄진다. 4월에 연둣빛으로 시작했던 녹음이 다시 연두로 돌아가는 초가을이다. 시장에 가니 반짝이는 연둣빛 아오모리 사과들이 리어카에 담겨 있다. 대견하다. 붉은색을 내기 전에 저렇게 모양을 갖추었다. 이게 그토록 오랜 진화 끝에 선을 보인, 세잔의 정물에서 허공과 숨막히는 경계를 이뤄내는 볼륨감 있는 바로 그 사과임을 보여주는 어린 희망들이다. 2천원에 대여섯 개, 심지어는 일곱 개까지 준다. 나도 모르게 비닐에 담는다. 어쩌면 가을을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원히 반복되는 연둣빛 발아
비틀스(Beatles), (One)
연둣빛의 이 사과를 어디서 또 봤더라. 사과를 들고 기억을 추스른다. 아, 이건 비틀스가 설립한 애플레코드사의 로고, 바로 그 사과의 색깔. 보통 애플레코드에서 나온 LP의 A면에는 반으로 가른 연둣빛 사과의 껍질 쪽이, B면에는 속살 쪽이 그려져 있었지. 비틀스는 생성 중에 있는 신화의 생생한 보고서다. 네 멤버는 육체성의 옷을 벗는 대신 신화적 이름을 입는다. 일종의 트랜스뮤테이션(transmutation),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1960년대에 단 하나의 밴드 비틀스만이 현존하는 것 같아 보인다. 신화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다. 무엇보다 현실과 꿈이 하나다. 그리고 모든 욕망이 하나다. 먹는 것이 섹스하는 것이고, 섹스하는 것이 쇼핑하는 것이요, 그건 또 배설하는 것이다. 아가에게 그 모든 것이 하나이듯, 신화의 세계에서 모든 욕망은 하나다. 비틀스가 2000년에 발매한 컴필레이션 음반 (One)은 그들이 남긴 차트 1위 곡들의 모둠이다. 그래서 음반 제목이 ‘1’이긴 하지만 이건 일종의 신화 마케팅이다. 비틀스라는 단 하나의 밴드, 그 신화의 세계로 소비자-아기를 이끈다. 모든 문화 상업주의는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아기와 동일시한다. 스타의 얼굴을 확대해 아기 눈에 보이는 어머니가 되게 한다. 비틀스의 은 이러한 신화 마케팅의 모범적인 사례다. 팝음악, 영화 등 팝의 세계는 이미 100년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장서를 자랑한다. 이 팝의 비블리오테크(도서관)에서 바이블이 된 비틀스의 경전들. 팝은 한편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지만, 다른 한편 그 경전들의 신화를 판매한다. 21세기 팝 마케팅의 중요한 경향이다. 역설적으로 이 경전들은 소비자를 연두색으로 만들고 스스로도 연두색 사과가 된다. 그것은 영원한 새싹, 발아의 순간을 반복한다. 반복의 미학은 이 시대 예술의 키워드다. 패턴의 시대니까. 패턴을 무한 복제하고 복제한 그것들을 다시 리믹스하는 시대니까.
두 마디짜리 패턴의 화학작용
랄리 푸나(Lali Puna), (Scary World Theory)
독일 밴드 랄리 푸나의 음악이 하도 세련돼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예전에 일본 시부야케 코넬리우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렇게 세련된 게 일본 음악인가 놀랬지만 랄리 푸나의 세련됨은 한 수 위다. 시원시원하고 와일드하면서도 드라이하고 팝적이고 달콤하면서도 실험적이고 급진적이며 노이지(noisy)하다.
이 밴드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유럽에서는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전자음악 밴드다. 케미컬 브라더스, 화학 형제의 유럽 투어에 동행해서 오프닝을 담당하기도 했다. 발레리라는 여자가 리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자가 한국 사람이다. 알고 봤더니 포르투갈로 입양된 소녀가 독일로 가서 밴드를 하고 있다.
랄리 푸나의 모든 음반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지만 그중에서 (Faking the Books)와 (Scary World Theory)는 21세기 초반에 나온 걸작들이다. 특히 는 랄리 푸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발레리의 귀뚜라미 소리 같은, 담담하고 내성적인 보컬과 세련된 노이즈들, 록의 역사를 압축하는 리듬이 아름답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결합돼 있다. 기본적으로는 반복의 미학이다. 우리 시대의 작곡가들은 한 시간짜리 교향곡의 변화무쌍함을 창조하지 않는다. 대신 120bpm의 두 마디, 그러니까 2초짜리 패턴을 만든다. 이 두 마디짜리 패턴의 분자는 무궁무진한 분자식들로 증식하면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패턴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패턴 하나에 몇 시간짜리 바그너 악극의 소용돌이를 압축해서 담아야 한다. 압축률 최고! 그러면 한 패턴의 반복 속에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보게 된다. 한 패턴이 반복되지만 듣는 사람에게 그 패턴은 계속해서 솟아나는 물방울처럼 끊임없는 변화를 보여준다. 반복되는 횟수만큼 새롭게 발견되는 패턴이 좋은 패턴이다. 그래서 패턴은 분수와도 같다. 덧없는 물방울들의 춤. 랄리 푸나의 패턴들도 그렇다. 이런 걸 일렉트릭 로맨티스트의 음악이라 부르면 어떨까. 초현대적 낭만주의. 드라이한 패턴에서 끌어낸 휴머니즘. 그래서 지금의 일렉트로니카, 그러니까 전자음악은 기본적으로 바로크적이고 조금 더 장식적으로 기능이 구체화되면 로코코적이다. 프렌치 터치를 창출해낸 프랑스산 전자음악의 경쟁력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
고층건물 네온불빛을 보는 우울함
다프트 펑크(Daft Punk), (Discovery)
다프트 펑크는 프랑스산 테크노의 최고봉. 기마뉘엘 드 오멤-크리스토(Guy_manuel de Homem-Christo)라는 재미난 이름의 학생과 토마 방갈테르(Thomas Bangalter)라는 학생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처음에 이 두 사람은 또 다른 친구와 인디 록 트리오를 결성했다가 나중에 전자음악 듀오로 전환해 다프트 펑크라는 이름을 내건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전자음악 듀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의 음악을 ‘로코코 일렉트로닉스’라고 부르고 싶다. 이 친구들은 굳이 말하자면 최고의 벽지를 가지고 최고의 도배를 해내는 ‘쟁이’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DJ들은 최고의 도배장이와 비슷하다. 다프트 펑크는 가장 아름다운 패턴을 생산한다. 그중에서도 1999년에 나온 (Discovery)의 아름다움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빛을 발하고 있다. 21세기 음악의 길을 열어놓은 이들의 음악은 비인간적이면서도 너무나 감상적이다. 마치 고층 아파트에서 멀리 반짝이는 네온 불빛을 바라볼 때의 우울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전자낭만주의. 특히 이 음반에 실려 있는 (Something about us)라는 노래는 전자낭만주의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을에 귀뚜리 소리에 믹스해서 들으면 나무에 매달린 형광 낙엽을 보는 느낌이 날 것이다. 반복되는 예쁜 패턴에 홀려 스르르 졸음을 느낀다.
귀뚜라미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DJ는 음악을 멈추지 않는다. 음악이 끊기면 모든 것은 끝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떤 순환들, 음악은 그 진동을 암시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가 멀어 작곡한 말년의 현악 사중주들처럼, 멜로디는 꼬리를 물고 패턴들은 서로 사랑하듯 휘감는다. 걱정과 희망과 오만 잡생각의 기포들처럼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귀뚜라미가 노래를 멈추기 전에 날이 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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