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처 이숙의의 유고 회고집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책 속에 담긴 ‘그’와 ‘그녀’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니, 가슴 한켠이 날카로운 것에 콱 찔리는 듯한 서글픔이 전해져온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3월1일, 경북 의성의 한 극장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장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공주여자사범을 졸업한 엘리트 여교사, 그는 불굴의 의지로 좌파 독립운동에 투신한 열혈청년이었다.
그를 처음 본 그녀의 머릿속은 갑작스런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무조건 끌리는 마음이 용솟음치면서 괴로웠다. 그 재사는 내 가슴속으로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스무 살의 그녀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랑’임을 직감했고, 그를 향한 그리움에 밤을 지새우며 괴로워했다.
스물다섯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며칠 뒤 연사로 나선 교양강좌 모임에서 연단 정면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 얼굴은 빨개지는데, 눈 둘 곳은 마땅치 않았다. 허둥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행복했고, 용기를 낸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기에 이른다. ‘그’의 이름은 남부군 빨치산 3지대장으로 역사에 기록된 박종근, 그녀의 이름은 이숙의였다.
‘그녀’ 이숙의의 유고 회고집 (삼인 펴냄)가 추억하는 시대는 혁명의 시대다. 해방 정국의 혼란과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꽃 같은 젊음들이 스러져갔고, 금세 바뀔 것 같던 시대는 그들의 열정을 배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글 속에서 그 시대를 살다간 여느 노인들의 회고담에서 보이는 고루한 ‘갑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서 한 발짝씩 벗어나 있다. 1947년 3월, 그를 찾아 서울로 온 그녀를 위해, 그는 포천에서 서울 돈암동에 이르는 길을 밤새 걸어 그녀의 곁에 닿는다. “찢어진 창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드는 새벽, 우리 서로는 할 말을 잊은 채 그저 살아 있다는 데에 감사했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쌔근쌔근 잠든 친척 아이의 숨소리와, 6개월 만에 헤어지고 만 남편의 체취와, ‘빨갱이’의 아낙으로서 하루하루 받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였다. 속에서 “여운형 선생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당하던 날”은 곧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고, “38선이 터지고 6·25가 발발한 해”는 “이제 그이를 만날 수 있게 되는구나” 하는 희망으로 마구 떨리던 해였다. 그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은 그를 그녀에게서 빼앗아갔고, 그 사건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뿐이었다. 그와 그녀는 1947년 6월10일 부부의 연을 맺었고, 1947년 12월3일 그가 월북하고 난 뒤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평생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분단도, 전쟁도, ‘빨갱이’의 아낙이 겪어야 했던 억울한 옥살이도, (심지어는) 그의 사망 소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랑의 ‘신뢰’ 문제였다.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은 책 뒤에 붙은 발문에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신혼 6개월 만에 방북했다가 다시 남쪽에 내려온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응답으로 일관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두고 ‘그녀’는 괴로워했다고 적었다.
일흔넷의 나이로 숨을 거두던 밤 ‘그녀’는 평생을 짊어지고 온 짐을 가뿐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2000년 북으로 돌아간 장기수 김익진을 통해 ‘그’가 ‘그녀’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2년 2월17일 영양군 화매리의 한 야산에서 전사했고, 그녀는 김익진의 증언을 듣고 난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딸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지금껏 유지해온 것은 여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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