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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떠나라, 이야기와 함께

등록 2007-07-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여름 휴가에 읽을 ‘이야기가 주인공’인 소설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먼저 이야기가 있었다. …우선 이야기되어야 할,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작가의 존재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픽션(이 있다)… 이야기는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작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이야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휴가다. 피서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이 눈가에 닿을 때까지는 기척을 못 느끼도록 빠져드는 책, 앞에 둔 팥빙수가 ‘레드빈 프라푸치노’가 되어버리도록 걸쭉한 책, ‘눈에 불을 켜고 읽’다 보니 긴긴 해가 산등성이로 꺼져간 것을 모르는 책, 그런 책이 그리워진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야기다. (교훈을 준답시고) 눈을 부라리지 않은 소설, 이야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설, 이야기의 목숨이 다한 때가 되면 딱 멈춰버리는 소설…. 휴가철에 읽을 이야기가 주인공인 소설들을 추천한다.

처음 인용한 글은 온다 리쿠의 (북폴리오 펴냄)에 나오는 말이다. 책 편집자인 아카네가 ‘소설에 대한 지론’을 펼치는 대목이다. 이런 편집자를 등장시키고 그렇지 못한 소설가에게 욕을 퍼붓게 하는 것을 보면 온다 리쿠는 ‘이야기 집착형’임이 틀림없다. 은 네 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편에서 동명 연작소설을, 연기를 피우면서 수상스럽게 등장시킨다. 유한마담과 한가로운 부자가 모여 샐러리맨을 놀려먹는 소재가 되는 이 소설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소설’이리라고 말한 ‘백지 상태’의 소설은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은 소설적 기교나 장치 생각할 것 없이 읽기에 부담 없다.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미스터리도 적당하고 반전도 깔끔하다.

‘말로센 시리즈’의 작가 다니엘 페낙이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과 같이 첫 문장을 쳤을 때 이 이야기가 어떤 놈이 될지 알았을까. “이 이야기는 광장공포증이 있는 어느 독재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분명 이 문장이 나타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리라. (문학동네 펴냄)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문다. 독재자는 광장에서 군중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닮은꼴을 찾아 대통령 자리에 앉힌다. 다시 닮은꼴은 채플린 영화를 본 뒤에 두 번째 닮은꼴을 앉히고는 자신은 영사기사가 된다. 여기에다 해먹에 몸을 흔들거리며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 과거의 작가가 등장한다. 작가는 닮은꼴 중 한 명을 만난 영화관 안내원 소냐를 만나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감사의 말에서 작가가 “친애하는 소냐, 당신이 살과 뼈를 가진 실제 인물이 아니라 한 명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즉 말로 이루어진 인물일 뿐이라는 걸 환기”해야 하기 때문에 끝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첫 문장을 쓴 뒤 나타난 ‘괴물’에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끌고 다니는 괴물은 힘이 넘친다. 배경도 엉뚱하고 등장인물도 난데없는데 그의 설레발은 어느 잘 짜인 ‘정치 게임’처럼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꾼들은 ‘주관’이 없다. 이야기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다. 점점 더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열린책들 펴냄)이 나왔다. (2003년)가 나올 때처럼 여름이고 뫼비우스가 그림을 그렸다. 그때처럼 한국에서만 나온 ‘특별판’이다. 베르베르는 ‘나비’를 타고 우주로 갔다. 범선을 조종하는 엘리자베트 말로리와 항공우주국의 이브 크라메르는 슬픈 인연으로 엮인다. 이브가 엘리자베트를 차로 치면서 그의 인생을 끝장낸 것이다. 물론 이브의 삶도 파괴된다. 이브는 초대형 우주선을 만들어 엘리자베트를 프로젝트에 동참시킨다. 초대형 우주선 파피용은 14만4천 명을 싣고 우주여행을 떠난다. 동물세계든 사후세계든 끝장을 보는 작가답게 파피용은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착륙한다. 세월은 1천 년이 흘러 있다.

이야기는 사람을 간지럼 태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뿜어져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추리소설로 달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소담출판사 펴냄)이 번역되어 나왔다. 가상의 악의 도시 산타바르바라에서 벌어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이야기다. 이 수다꾼은 이야기하고 싶어서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이다. 닉 혼비의 (미디어2.0 펴냄)는 영화 (제목이 어처구니없는데 의외로 큰 파급력으로 동종 유사 제목을 만들어냈다)의 원작이 된 소설이다. 영화에서도 말이 많더니 책으로 펼쳐놓고 나니 아연하고 실색할 정도다. 여자에게 차이고 나서 지난 여자들을 추억하는 남자의 끝없는 ‘야부리’가 즐겁다. 터키로 가면 아지즈 네신이라는 막강한 수다꾼이 있다. 터키의 국민작가인 아지즈의 책은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한 권 번역되었다. (푸른숲 펴냄)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된 야사르가 교도소에서 ‘내 말 좀 들어보소’ 식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야샤르의 이야기는 ‘오스만’이라는 남자의 실화다. 러시아 수다꾼으로는 도스토옙스키가 (여전히) 최고다. (열린책들 펴냄)을 비롯해 새로운 판형으로 올 초 다시 나왔다.

‘한류스타’ 안재욱을 닮은 중국 작가 쑤퉁은 한국 ‘중류소설’의 첨병이다. 그의 소설은 중구난방으로 정신없이 뻗어나간다. (아고라 펴냄)에는 세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이혼지침서’는 이혼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양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소설적 재능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는 듯 다른 두 단편인 ‘처첩성군’과 ‘등불 세 개’는 고즈넉한 분위기다. 한국의 대표적인 해학꾼 성석제가 올 초 낸 중단편집 (문학동네 펴냄)을 놓쳤다면 여름에 챙기자. 조금 유감스러운 점은 에서 성석제가 너털웃음을 길게 웃는다는 것. ‘고귀한 신세’는 즐겁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는 숙연해진다. 윤성희는 (창비 펴냄)에서 이야기가 스스로 뻗어나가는 경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발통이 달려서 굴러간다. 로또복권 숫자 맞추기로 이어가고(‘구멍’) ‘도마’의 유전으로 이어가고(‘이어달리기’) 친구는 친구를 낳으며 이어가며(‘안녕! 물고기자리’) 특별한 직업열전(‘리모컨’) 식으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다. ‘엔터’ 별로 치지 않는 기다란 문단들 속에서 연상되는 것은 타이핑을 멈추지 못하는 작가의 손이다. 그 손을 누가 움직였던가.

부모가 책을 읽으니 애들에게도 한 권 건네주어야 하리라. (서울문화사 펴냄)는 으로 2002년 뉴베리상을 받은 동화작가의 신작 동화집이다. 미국 플레인필드로 이사한 줄리아 송이 옆집의 패트릭과 누에치기를 해나간다. ‘일하자-배우자-베풀자-살리자’라는 위글 프로젝트를 위해서다. 줄리아는 누에치기가 ‘한국적’이기 때문에 싫다. 줄리아는 ‘비밀요원 송’이 되어 프로젝트에 꽂힌 패트릭을 방해한다. 에 린다 수 박은 ‘그냥 읽어넘어가도 좋’은 대화를 장의 끝부분마다 삽입했다. ‘나’는 ‘박 선생님’에게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면서 징징대고 ‘박 선생님’은 내일 스케줄이 있으니 오늘은 대화할 시간이 없다고 ‘나’보고 가라고 말한다. 린다 수 박 역시 이야기가 흘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내가 언제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란다. (…) 우린 둘 다 이 이야기의 대장이 아니란다. 이야기 자체가 대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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