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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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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지혜

등록 2007-02-09 00:00 수정 2020-05-03 04:24

▣ 손영숙 경기도가족여성개발원 교수

유기농 식품이 유행이다. 건강을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가격이 좀 비싸도 유기농 식품을 선호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상추 같은 간단한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번이라도 상추씨를 직접 뿌려본 사람이라면 채소 상자 가득하게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상추 잎을 경이롭게 바라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추를 제대로 길러 먹으려면 그 촘촘하게 올라오는 상추 싹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아깝지만 어린 잎새들을 중간중간 뽑아내는 솎아내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상추 잎이 제대로 자란다. 제대로 자라기 위해 버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뇌가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도 버리는 지혜가 필수적이다.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만일 선택권이라도 주어졌더라면 참 큰일날 뻔했다. 상추의 어린잎을 솎아버리는 것은 그다지 아깝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내 뇌 속의 신경세포를 솎아내는 일을 내 손으로 해야 했다면 좀처럼 손을 대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도 내 뇌는 주인인 나와 의논하지 않고 바깥세상과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 솎아내기를 한다.

솎아내기를 통해 버려지는 것 중에 신경세포 자체도 있지만 가장 많이 버려지는 것은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통로이다. 하나의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을 맺는 것을 뇌 과학에서는 ‘시냅스’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두 신경세포가 접점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통로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신경세포는 일단 주변의 수많은 다른 신경세포들과 수없이 많은 접점, 즉 시냅스를 형성해놓은 뒤 바깥세상과 교감하면서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정한다. 이때 버려지는 것들은 대개 하는 일이 시원찮은 연결 통로들이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자. 인적이 드문 산이나 벌판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겨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다녀본 뒤에는 가장 다니기 편하고 빠른 길만 남고 나머지 길들은 다시 잡초에 묻혀버릴 것이다. 만일 그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어느 하나가 선택되지 못하고 모든 길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위험한 길, 멀리 돌아가는 길, 중간에 막힌 길 등을 미리 알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 우리 뇌의 신경 연결 통로 역시 그와 비슷한 시험 가동을 통해 쓸모있는 것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뇌 발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기가 ‘자란다’ 혹은 ‘발달한다’는 말을 할 때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는 커지고 무거워지고 많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뇌 발달은 조금 다르다. 신경세포가 많다고 꼭 좋은 것이 아니고 신경 연결 역시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군살이 옷맵시를 망치고 군더더기 문장이 글맵시를 망치듯 쓰임새가 없는 신경세포와 신경 연결은 뇌 기능을 오히려 저하시키고 뇌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

몸집을 불리는 것보다는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채식을 하고 식사 조절을 하고 운동을 하며, 기업들은 그래서 구조조정을 하고 조직개편을 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불필요한 살, 불필요한 조직을 떼어내듯 불필요한 신경세포와 신경 연결을 아낌없이 버리는 지혜가 있기에 우리 아기의 뇌가 쑥쑥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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