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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뇌, 그 남자의 뇌 ①

등록 2006-12-29 00:00 수정 2020-05-03 04:24

▣ 손영숙 경기도가족여성개발원 교수

매일 신문과 TV의 스포츠 뉴스를 화려하게 꾸며주던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운동선수들이 달리기, 높이뛰기, 양궁 등등의 종목에 출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필자는 수렵채집기 때 중요했던 삶의 기술들이 이제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경기장에서 보존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박물관에 가면 고대나 중세 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각종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운동경기장에 가면 그 옛날 인류의 생존에 필요했을 기술 목록들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수렵에 의존하지 않고 따라서 움직이는 목표물을 쏘아 맞히는 기술이나 멀리 던지고 빨리 달리는 기술이 생존에 꼭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 옛날 생존에 필요했던 기술들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서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인간 행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렵채집기가 무려 20만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되었던 까닭에 우리 유전자에서 그 흔적을 지우려면 그 못지않게 긴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수렵채집기 생활방식의 흔적은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남아 있으며 우리가 종종 이야기하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역시 수십만 년 동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생존을 위해 노력해온 흔적과 다름없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차이인 여성의 임신, 출산, 수유 능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성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결과 여자들은 사냥에 따라 나서는 대신 양육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사표현이 서툰 아이들과 소통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했고 부족 내의 다른 여자들과도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에 출산과 수유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외부 침입자나 위험한 동물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멀리까지 나가서 사냥으로 먹을거리를 구해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에게는 표현능력, 공감능력, 섬세한 손동작 등이 요구되었고 남자들에게는 방향감각, 공간능력,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능력 등이 필요해졌다.

남녀에게 생활의 기술이 달리 요구되는 상황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자 아예 각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좀더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장치를 뇌에 내장하기에 이르렀다.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가 약간 다른 생김새를 갖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장 장치의 차이는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생활환경이 변화하고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생활 기술이 변화하면, 그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변화된 생활 기술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뇌 안에 내장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여자와 남자의 행동양식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는 후기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생존에 필요해서 생긴 차이가 결코 아니다. 또한 어떤 필연에 의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차이도 아니다. 우리의 뇌 구조나 유전자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시간차가 발생한 탓에 생겨난 결과적인 현상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 중에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키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있다. 그 근거로 생물학적으로 남녀가 다르다는 것을 든다. 남녀의 생식기 구조와 더불어 이를테면 뇌 구조마저도 다르다는 사실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자의 뇌가 그 여자의 행동을 만드는 게 아니다. 길게 보면 그 여자의 행동이 그 여자의 뇌를 만든다. 그 남자의 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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