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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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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은 연주하고 산은 불탄다

등록 2005-09-29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바탕 제전이 펼쳐질 시간, 기차를 타고 가을산의 단풍을 둘러보라
간이역에 내려 발견한 낡은 역사의 그윽한 미학과 자연의 이채로움

▣ 박원식/여행전문 작가

기차를 타고 가을 산으로 간다. 산중 시골 역에 도착해 거기 파랑처럼 일렁거리는 산천경개 속으로 들어간다. 산들은 지금 묵상에 잠겨 있다. 폭염의 질탕한 애무로 뜨거웠던 지난 여름을 추억하며, 아울러 점점 깊어지는 가을을 명상한다. 산들은 이제 한바탕의 제전을 펼칠 것이다. 산정(山亭)부터 서서히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해 이윽고 온산에 단풍 홍염(紅焰)이 번질 것이다.

기차 여행을 한 적이 언제였던가. 자동차라는 네 바퀴 물건이 지구를 뒤덮기 시작하면서부터 여행 수단으로써의 기차는 그 위세를 황급히 반납하게 되었다. 산중 간이역으로 입장하는 여행 방식은 더욱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말았다. 태평하고 태연한 완행 인생들의 친애할 만한 형제였던 굼벵이 완행열차도 멸종했다. 하지만 완행열차의 견결한 동맹자인 간이역이 아직 잔존한다.

간이역을 통한 산중 여행은 의외의 커다란 만족감을 선물한다. 당신이 민감한 감성을 가진 여행자라면 아주 오래된 역 건물이 연주하는 세월의 선율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후미지고 외진 벽촌에서 시간의 이끼를 뒤집어쓴 채 부질없이 늙어가는 낡은 역사(驛舍)가 강의하는 그윽한 미학을 경청하게 될 것이다. 향수와 우수를 덩달아 느끼게 될 것이다.

간이역이 야기하는 내향적인 울림으로써 간이역으로 가는 여행은 사색과 명상을 야기한다. 서정과 시정(詩情)을 동반하게 된다. 여기에 간이역 여행의 이색과 이채가 있다. 그리고 역사 바깥의 저 사방팔방에는 산들이 대기한다. 싱그럽고 은은한 가을 산이 굽이친다. 투명한 가을 하늘의 푸른 치맛자락이 산마루에 걸쳐 있고, 바람이 불어 숲을 흔든다. 길들은 산 아래로 마중을 나온다. 도시를 탈출한 여행자는 정겨운 산길의 손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현란한 단풍의 예감에 사로잡힌 가을 산의 그윽한 향기 속으로!

● 중앙선 희방사역

우르릉쾅쾅, 계곡을 흔든 물벼락 소리

단풍 현란한 희방사 계곡. 기차가 이윽고 희방사역(喜方寺驛)에 도착한다. 배낭을 둘러메고 플랫폼으로 내려선다. 서늘한 산중 공기가 살갗을 파고든다. 역 건물 뒤편엔 거대한 산이 치솟아 있다. 소백산(小白山·1394m)이다. 역사는 조용하다. 이 역엔 하루 네 차례 상·하행 기차가 멈추지만, 타고 내리는 이는 겨우 열명 안팎이다. 휴일이면 무리 지은 등산객과 소풍객들이 우르르 밀려들기도 하지만 평일엔 늘 한산하다.

희방사역 일대는 그 옛날 꽤 버글거리던 장소였다. 객주와 마방(馬房)이 설치됐던 교통의 요충이었다. 소백 마루를 넘어가는 죽령 고갯길상의 중간 경유지였다. 역 건물을 뒤로 하고 서쪽 산기슭을 바라보며 죽령 옛길을 오른다. 이 길은 과거의 죽령 고갯길을 복원한 것이다. 고갯길은 거듭 꺾이고 휘어지고 굽이돈다. 죽령 옛길 끝에는 죽령 주막이 있다.

조선의 주막을 재현한 초가 목로주점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감자전에 탁주 두잔을 목으로 넘긴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고개 아래 검문소 삼거리까지 이른 뒤 희방사를 찾아 타박타박 걸어간다. 희방사 계곡 일대는 가을 단풍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다.

계곡을 오르자 별안간 우르르쾅쾅 물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와글거린다. 희방폭포다. 영남 제일의 높이 28m짜리 폭포수가 계곡을 진동시킨다. 폭포 위 허공엔 물빛처럼 투명한 하늘이 걸려 있다. 청명한 가을 하늘빛이 일시에 하강해 폭포수 물살에 몸을 던지는 것 같다. 이윽고 희방사 경내로 들어선다. 소백산 남쪽 기슭, 해발 850m 지점에 터를 잡은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조사가 창건했다. 귓전에 오래 울리던 폭포 소리는 이미 끊겼다. 대신 순하고 나직한 계류 소리가 찰랑거린다. 물소리 선율만 나직하게 울리는 산중 절집의 무심한 정적에 심신이 젖어든다. 산과 하늘이 이룬 가을 수채화에 마음을 앗긴다. 순결하고 순수하고 담백한 가을 산사의 그윽한 정취에 흠뻑 취해든다. 가을 산사의 적막에 어린 평온과 평정을 예배한다.

● 충북선 삼탄역

그 잘난 인등산의 짙어지는 가을빛

산 깊어 더욱 그윽한 강변 정거장. 방금 기차가 떠나간 삼탄(三灘)역엔 정적만이 가득하다.

이 역의 정적은 필연이다. 산과 산의 연쇄 안에 거주하는 산간 기차역이니까. 대합실을 나와 역전 뜰을 가로지르자 이내 강물이 눈에 들어온다. 삼탄역은 강변 정거장인 것이다. 가을날의 짙은 초록 강물이 협곡 사이를 굽이친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은 선율처럼 부드럽게 휘어지고 굽어지고 에워돈다. 기차 정거장과 이어지는 길 중에 이렇게 정감 어려 따스한 오솔길은 드물다.

삼탄 명서리 동구에 서서 강의 장쾌한 파동을 바라본다. 강변 백사장에 나아가 강의 율동과 강변 가을산이 주재하는 풍경의 파노라마를 관람한다. 삼탄이란 세개의 여울(灘·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위쪽의 광청소여울, 소나무여울 그리고 아래쪽 따개비소여울을 뭉뚱그려 삼탄이라 부른다. 단애 아래를 헤살하며 굽이치는 세 여울의 절경에 삼탄의 진수와 진실이 배어 있다. 아울러 자못 웅장한 산세가 가세해 삼탄의 심원한 풍미를 배가한다. 사실 여기 산간은 화전의 민생이 피고 진 아찔한 오지였다. 이젠 이름을 날리는 명승 반열에 올라섰지만 원래는 고달픈 민생이 이어져온 아득한 벽촌이었다.

삼탄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어머니 산은 인등산(人登山·666.5m)이다. 삼탄역 서편 가까이에 자리한 인등산은 부근의 천등산(天登山)·지등산(地登山)과 함께 삼등산으로 통하는 명산이다. 그래서 수시로 등산객이 나타나 산행에 나선다. 바람이 전하는 현란한 전설에 따르면 인등산은 이른바 용비등천혈(龍飛登天穴)의 길지(吉地)다. 정감록 역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이름 재료로 따다 붙인 삼등산에 관한 평론을 삼가지 않았으며, 난리가 터지면 사람들은 흔히 여기 인등산 자락에다 위태한 명줄을 의지했다. 이 잘난 인등산에 가을빛이 점점 짙어진다. 점차 가을이 무르익어 마침내 황홀한 단풍이 요요히 번질 것이다. 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단풍빛이 어릴 것이다.

● 영동선 통리역

그랜드캐니언이 부러울 소냐, 통리협곡

한국판 그랜드캐니언, 통리협곡의 가을. 산촌역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낡은 역 건물이 있고 손바닥만 한 역전 상가가 펼쳐진다. 통리역전 경치도 마찬가지다. 한때 통리는 매우 번성한 대처였다. 대책 모를 오지 산촌이었던 통리는 1940년 통리역이 설치되면서 팔자를 바꾸었다. 석탄 수송 기지로 도약했던 것이다. 인근 태백이나 사북 고한 등지에 기차역이 없었던 때라서 원근 도처에서 생산된 석탄들이 자동차에 실려 통리역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통리 일대에 광산 사무실과 저탄 사무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덩달아 숙박업소와 제재소, 음식점, 상점, 주점 등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이런 통리의 전성기는 1960년대까지 지속됐다. 그러다 영동선 철길의 완전 개통과 더불어 갑자기 벼랑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인근에 황 지역이 생기면서 석탄기지로서의 위세를 황급히 반납해야 했다. 화물과 승객 운송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통리역의 곤두박질과 함께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상권은 일거에 와해됐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매우 빠르게 몰락한 이 무렵 통리의 쇠망사는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전을 벗어나 산으로 들어간다. 언덕길을 걸어 다시 내리막 산길을 지나 통리협곡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미인폭포를 만난다. 강물이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은 주로 침식과 퇴적 작용에 의해서이며, 침식작용이 빚어내는 조화의 대표적인 예는 협곡이다. 협곡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것이 미국 콜로라도강이 만들어낸 거대한 천연 조각물, 그랜드캐니언이다. 그런데 지질학자들이 '한국판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는 협곡이 있다.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남쪽 오십천 상류 일대에 형성된 통리협곡을 일컫는 것이다. 거기 운보산 기슭의 1만여평 너른 고원을 오십천 강물이 270m나 파고 내려가 너울너울 굽이쳐 흐르는데, 중생대 백악기 역암층의 심한 단층운동과 강물의 활발한 침식작용으로 인해 V자형 협곡을 이룬 곳이다. 이 웅장하고 통쾌한 통리협곡의 상단부 바위벼랑에 바로 미인폭포가 걸려 있다.

폭포 높이는 약 30m. 그러나 한결 거창해 보인다. 암벽의 검붉은 색조와 폭포의 하얀 물줄기가 대조를 이루면서 한결 장엄한 풍광을 연출한다. 호방하게 쏟아져내리는 물소리로써 폭포의 거한임을 웅변한다. 저 아래로 이어진 협곡의 연쇄를 감독하고 호령하는 양 억센 고함을 토해낸다. 미인폭포는 이렇게 통쾌하다. 통렬하다. 이것이 미인폭포의 이색이자 묘미이다.




여행 메모

● 중앙선 희방사역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위치한 희방사역은 소백산 남쪽 기슭의 산중 간이역. 역의 옆댕이에서 시작되는 죽령 옛길을 답사한 뒤 희방사에 입장한다. 소백산은 설악산에 이어 단풍이 빨리 드는 산. 다른 산에 비해 단풍 기간은 다소 짧은 편이지만 곳곳에 산재한 기암 괴석이나 폭포 등이 운치를 더해준다. 특히 희방사 계곡 일대의 단풍이 빼어나다. 희방사 들머리 국도변에는 위락지구가 있다. '모텔 2010(054-636-2010)', 희방모텔(638-8000), 희방식당(637-6240), 소백산 가는 길(637-0410) 같은 숙식 업소가 있으며, 인삼동동주와 산머루주가 나오는 죽령주막(638-6151)도 들러볼 만한 맛집이다.
▲ 열차 시각 청량리역에서 06:50, 15:00에 출발하는 열차가 11:13, 18:34에 각각 희방사역에 도착. 희방사역에서 09:09, 13:31에 출발하는 열차가 12:41, 18:53에 각각 청량리역에 도착.

● 충북선 삼탄역 충주시 산척면 명서리에 소재한다. 삼탄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수려한 강물과 칠칠한 산들의 조화로운 동거를 감상하는 데 있다. 가을 단풍이 만발하는 인등산의 산행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아담하고 소탈한 암자 일광사는 삼탄역 서편 철길을 건너 산길 소로를 따라가면 나타난다. 명서리의 일흥가든(043-851-6751), 약수가든(852-6936)에서 식사와 민박을 할 수 있다. .
▲ 열차 시각 조치원역에서 06:44, 10:36, 15:10, 18:05에 출발하는 충북선 열차가 각각 08:14, 12:03, 16:51, 19:46에 삼탄역 도착. 상행은 삼탄에서 09:51, 13:58, 18:58에 출발하는 열차가 11:23, 15:38, 20:37에 각각 조치원역 도착.

● 영동선 통리역 고원 관광도시 태백시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통리역은 해발 680m의 고산지대에 자리한 산골 기차역. 개벽과 추락을 연달아 겪은 통리 특유의 사회 변천사를 염두에 두고 역전 거리를 음미해본다. 5자 붙은 날 통리를 여행한다면 십일장의 별난 맛을 누릴 수 있다. 통리협곡과 미인폭포를 만나기 위해선 통리역 입구 삼거리에서 원덕 방향으로 가는 언덕길로 접어들어 1km쯤을 걸어간다. 그러면 왼쪽에 미인폭포와 혜성사 입구임을 알리는 팻말이 보이는데, 거기서 내리막 산길 300m를 걸어가면 미인폭포가 나타난다. 미인폭포 근방엔 영업집이 전혀 없다. 통리쪽 맛집으로는 칼국수와 보리밥을 전문으로 하는 한서방칼국수집(033-554 -3300)이 알려졌다.
▲ 열차 시각: 청량리역에서 08:00, 10:00, 12:00, 14:00, 22:00, 23:30에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 각각 12:45, 14:42, 17:01, 18:48, 02:54, 05:17에 통리역 도착.

● 열차 안내 한국철도공사(www.korail.go.kr), 희방사역(054-638-7788), 삼탄역(043-852-7786), 통리역(033-552-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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