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도손 모여 앉은 ‘미아리 점성촌’의 40년 역사… 새로운 역학 트렌드의 파고에 조용히 늙어가나
▣ 글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이 급팽창하기 이전 미아리고개는 서울의 관문에 해당했다. 비록 길이 넓지도 포장도 돼 있지 않았지만 1950년대 서울의 유일한 북쪽 외곽도로였던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때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서울을 지키던 한국군의 교전이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졌고, 북으로 끌려가던 가족을 눈물바람으로 배웅해야 했던 곳도 미아리고개였다. 대중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도병씨 성공신화에 하나 둘 몰려 와
동선동·돈암동과 정릉을 잇는 지금의 미아로, 곧 미아리고개는 본래 되너미고개(돈암현)로 불리던 곳이었다. 유래에 대해서는 분분하다.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왔다고 하여 되너미고개가 됐다고도 하고, 서울에서 의정부로 나가는 마지막 고개로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는 설도 있다. 또는 고개가 몹시 가팔라서 허기가 질 정도이기 때문에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했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보자면, 미아리고개 곧 되너미고개는 예로부터 경사가 급한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아리에 점성촌이 들어선 것은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64)씨가 이곳에서 복술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본래 서울에는 남산 기슭인 중구 양동 판잣집에 맹인 역술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철거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남산에 살던 이도병씨는 집값이 싸고 전차 종점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미아리로 옮겨왔다. 1960년대 초 서울시는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길 주변에 옹벽을 세웠다. 남북 방향으로 옹벽을 만들면서 동서 횡단하는 길을 그 밑으로 뚫어 자연스레 굴다리가 생겨났다. 이도병씨도 처음엔 이 굴다리 밑에 작은 의자를 하나 놓고 ‘노점’을 시작했다고 한다. 옹벽과 굴다리로 그늘지고 으슥한 ‘낮은 곳’은 시각장애 역술인들을 보듬는 ‘인공 구조물’이 된 셈이다. 굴다리 밑에서 거리에서 점을 쳤던 이도병씨의 점이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꼬였다. 개업 2년 만에 이씨는 가게를 얻어 손님을 받았고 10년 만에 꿈에 그리던 내 집 한칸을 마련했다.
당시야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특히 생계가 막막하던 시각장애인들의 꿈이야말로 자식들 안 굶기고 남들처럼 가르치는 일이었다. 제집 마련하고 4남매 고이 길러낸 이도병씨의 ‘성공신화’에 힘입어 갈 곳 없던 동료 역술인들도 하나둘 옮겨왔다. 밤 12시 통금이 있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름밤이면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미아리고개 도로에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올라 한담을 나누는 풍경이 익숙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도성장기였던 70~80년대엔 미아리도 함께 호황의 분위기를 나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시각장애인 역술원이 100여곳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현재는 1km 남짓한 도로 양편에서 70여곳이 영업 중이다. 대부분 점집과 살림집을 겸하고 있으며 역술인의 60% 정도가 자택을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대한맹인역리학회의 학술이사이자 미아리고개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심남용씨는 미아리고개에 점집이 번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점성학적인 풀이를 내놓았다. “미아리고개 너머엔 일제 때 조성된 한국인 전용 묘지가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서울의 북북동에 해당하는 미아리고개는 영혼이 다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북쪽은 황제의 별인 자미성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북두신앙이 기대는 방위다. 사람의 영혼과 운세를 다루는 미아리 점성촌이 성행하게 된 데는 이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결 과시하며 70여곳 영업 중
1984년 의정부에서 미아리로 옮겨온 이래 꾸준히 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송오순(64)씨는 “점집이 많이 모여 있다 보니 딱히 단골이 없더라도 ‘미아리’만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어서 다른 곳보다 벌이가 낫다. 또한 협회(대한맹인역리학회) 회원들끼리 함께 모여살기 때문에 공부도 함께 할 수 있고 서로의 형편도 걱정해주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협회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보니 점집이 많이 몰려 있는 신촌·압구정 일대와 달리 단결이 잘된다. 나름대로 정한 원칙에 따라 ‘상도’를 준수하는 것도 특징이다. 가령 미아리 점성촌엔 다른 동네 점집 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사’ ‘처녀보살’ ‘도령’ 등의 문구가 없다. 송오순씨는 “처녀도 아닌데 처녀라고 하거나 영험한 초능력이 있는 도사라고 내세우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 그런 표현은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앞 못 보는 사람들이니 손님이 금반지를 꼈는지 비단옷을 입었는지 알 길 없다. 단지 연월일시에 따른 사주풀이를 정직하게 말해줘야 한다. 역서에 나와 있지 않은 실언을 늘어놓는 것은 금기시된다.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부분만 말해야지 허황되게 꾸미면 안 된다.”
이들의 단결력은 이익 보호 차원에선 더욱 철저하다. 미아리 점성촌이 소문이 나면서 몇몇 비장애인들이 점집을 열려고 했지만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역술인 대부분이 집주인이기 때문에 가게를 임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엔 열혈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찾아와 ‘예수 믿으라’는 피켓 시위를 여러 날 계속하다 역술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이들을 내쫓았다고도 전한다.
100년 전 개화기때나 지금이나 ‘미신 타파’는 미아리 점성촌에 항상 들러붙는 비판이다. 90년대 말 성북구는 미아리 점성촌을 정비하는 계획을 세웠다. 미술대학에 의뢰해 점성촌 간판을 새로 디자인하고 거리 상징물을 세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자체가 나서서 미신숭배를 조장한다’는 기독교계 신문의 일갈에 성북구는 꼬리를 내렸다. 사업은 흐지부지됐고 담당 공무원들도 모두 자리를 옮겼다. 성북구의 한 공무원은 “기독교 신자들의 항의가 두려워 미아리 점성촌에 대해선 어떤 정비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요즘 미아리 점성촌에 가면 들머리에 점성촌의 유래를 알린 간판이 서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를 오방색으로 꾸민 비슷한 간판들에서는 당시 중도 하차한 정비사업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정비사업, 기독교에 번번히 막히고
시각장애 안마사들이 ‘아가씨’들을 앞세운 유흥자본의 침식에 설 자리를 잃었듯, 미아리 점성촌 역시 타로카드를 비롯해 인터넷·전화를 이용한 운세풀이 등 나날이 새로워지는 ‘역학 트렌드’의 파고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사주가 돈 많이 버는 게 아니니 딱히 돈 벌겠다는 소원이 있을 리 있나. 이제 자식들 다 키웠으니 이렇게 미아리에서 살다가 나중에 편하게 죽는 것만이 소원이지.” ‘매화부인 예언가’로 20여년을 살아온 송오순씨는 얘기 끝에 한마디 보탰다. 미아리 점성촌 또한 연 2조~3조원로 추산되는 거대한 ‘점 시장’의 한켠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은 미아리 점성촌의 오늘과 내일을 요약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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