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직의 꿈, 언제 끝날까

등록 2004-12-30 00:00 수정 2020-05-03 04:23

변함없는 직장인 새해 소망 1순위 이직·전직… 연봉삭감·지방근무 감수하며 안정좇는 직장인 늘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가 1년 만에 이렇게 또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늘고 길게 살다가 정년퇴직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는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합병의 아픔을 겪으며 이렇게 험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이아무개씨) “1991년부터 시작해 벌써 7번째 직장입니다. 합병과 분사를 제외하더라도 5번째 직장이군요. 제가 이렇게 변신(?)을 거듭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쩝∼.”(최아무개씨) “이렇게 빨리 은행을 떠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은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김아무개씨)

엘리트 직장인의 이직 아픔

1998년 국민은행에 합병된 옛 장기신용은행 출신 직원들의 인터넷 모임에 들어가보면 ‘전직 신고’ ‘옮겼습니다’ 등 직장 이동을 알리는 개인 신상 변동이 게시판에 숱하게 올라와 있다. 옛 장기신용은행은 월급봉투를 두개나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는 직장이었다. 또 직원 대다수가 명문대 출신이고 3분의 2가 석사 이상일 정도로 우수 인재들이 몰려 있던 회사였다. 그러나 인수·합병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경쟁이 격화되는가 하면 기업마다 상시 구조조정 체제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직장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직장인들이 꼽은 새해 소망 1순위는 여전히 ‘이직·전직’이다. 올 실업급여 신청자 수가 사상 최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등 실업자가 늘고 극심한 취업난이 지속되고 있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상당수 직장인들은 이직의 꿈을 안고 살고 있다. 서울디지털대학이 12월 중순 전국의 직장인 836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2004년에 어떤 목표를 세웠느냐”는 물음에 전체 응답자의 30.4%(254명)가 ‘이직·전직’을, 13.5%가 ‘연봉 인상’을 꼽았다. 20대는 ‘이직·전직’(38.6%), ‘결혼’(14.2%) 순으로, 30대는 ‘이직·전직’(22.1%), ‘승진’(18.7%) 순으로, 40대는 ‘이직·전직’(19.2%), ‘건강 관리’(15.4%) 순으로 지난 한해의 목표를 세웠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다수(79.3%)가 “2004년에 계획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2005년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일”로는 또다시 ‘이직·전직’(29.4%)을 가장 많이 꼽았다. 취업포털 스카우트에 따르면, 직장인 2261명 가운데 532명이 “사표를 작성해 책상 서랍에 넣고 다닌 적이 있다”라고 답했다.

물론 이직을 꿈꾸는 개인적 사유는 다양하다. 취업난 때문에 일단 붙고 보자는 ‘묻지마 취업’을 했다가 방황 끝에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의 장래가 불안해지면서 이직을 고려하는 직장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옮길 때가 된 것 같아서’ ‘현재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보다는 경기 침체에 따른 회사의 비전 상실, 고용 불안 등이 ‘새해 소망 1순위 이직’의 배경에 깔려 있다.

서울 시내 ㄱ대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아무개(38)씨는 ‘성공 이직’의 꿈을 이룬 경우다. 김씨는 대학 졸업 당시 가장 유망한 업체로 손꼽히던 정보통신업체에 입사했다. 친구들은 “보수 수준도 최고인데다 장래 성장성이 돋보이는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며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경쟁이 격화되면서 회사의 수익성은 갈수록 악화됐고, 2000년 들어 유동성 위기를 맞는 등 회사는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이어졌고, 회삿돈까지 빌려서 산 자사주 가격은 갈수록 떨어졌다. 김씨는 차츰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올해 대학 교직원 공채로 눈을 돌렸다.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교직원이 된 그는 “보수도 더 많고, 무엇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라서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자리 보존 벅차… 옮겨도 후회?

노동부 고용정보망인 워크넷에 올라 있는 2004년 2분기 구인·구직 취업 통계는 이직·전직을 꿈꾸는 직장인의 증가 현상을 수치로 보여준다. 나이별 구인배수(구인 인원 대비 구직자 수)를 보면, 25∼29살 구인배수(신규 구인 인원 5만9천명/신규 구직자 수 7만1천명)는 0.83인 반면, 30∼34살 구인배수(5만1천명/5만2천명)는 0.99, 35∼39살 구인배수(3만9천명/3만8천명)는 1.03을 기록했다. 심각한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구인 인원 대비 구직자 수가 가장 높은 나이가 대부분 직장인인 35∼39살로 나타난 것이다.

이직 소망은 연봉에 대한 불만보다는 기업의 미래 불안에서 비롯되고 있다. 취업 포털 ‘커리어다음’이 직장인 13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보면 직장인 2명 중 한명이 연봉이 삭감되더라도 좋은 회사가 있으면 이직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지방 근무는 무조건 기피하던 예전과 달리 안정성과 성장성을 갖춘 회사를 찾아 지방까지 눈을 돌리는 직장인도 많다. 미혼인 황아무개(34)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올해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대전에 있는 정보통신업체 ○○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안정되고 비전이 있는 회사라고 생각해 지방 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왔다”며 “장래 계획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미래가 확실한 직장이라면 지방에서 근무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직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붙어 있는 것조차 당장 급한 직장인들도 많다. 취업 포털 ‘스카우트’에 따르면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에게도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할 것’(25.3%), ‘다른 직장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21.2%)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카우트 신길자 팀장은 “직장을 옮긴 뒤 더 나빠졌다는 사람도 많다”며 “고용 사정이 나빠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이직 생각은 굴뚝같아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직도 쉽지 않고 이직 뒤에 오히려 후회하는 사람도 생겨나면서 이직을 위한 ‘커리어 컨설팅’을 받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이직에 필요한 자신의 커리어와 적합한 직종에 대해 먼저 컨설팅을 받아 준비한 뒤 나중에 안정적으로 이직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공적인 이직에 필요한 것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평판을 꾸준히 관리하라는 것이다. 이직하더라도 ‘레퍼리 체크’(Referee Check)라고 해서 이전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업무 태도나 성향, 평판을 조회하는 경우도 많다. 둘째, 성공 사례를 만들라는 것이다. 기업은 팔방미인보다 특정 분야의 전문 경력자를 원한다. “○○ 분야에서 열심히 일했다”는 막연한 내용보다는 자신이 특정 분야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 확실한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재취업 임금이 오히려 낮아질수도

한국노동연구원이 1995∼2002년까지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자발적 이직률(매년 1월 현재 취업 중인 어떤 개인이 1년 안에 이직할 확률)은 1999년 20.9%, 2001년 23.2%, 2002년 18.0%로 나타났다. 연령별 자발적 이직률은 20대가 1999∼2001년에 27∼32%, 30∼45살이 17∼19%로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나, 2002년에는 오히려 30∼45살의 자발적 이직률이 18.4%로 20대의 자발적 이직률(17.5%)을 앞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직장인들의 이직·전직이 그만큼 늘었음을 시사한다.
‘전직 목적의 자발적 이직률’만 봐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적극적으로 다른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이직하는 비율은 매년 10% 안팎인데, 2001년까지는 20대의 전직 목적의 자발적 이직률이 30∼45살보다 높았다. 그러나 2002년에는 이런 흐름이 역전돼 30∼45살의 전직 목적 자발적 이직률이 8.6%로 20대(6.7%)보다 높게 나타났다. 또 2002년의 경우 근속 기간별로 1년 미만의 전직 목적 자발적 이직률이 11.1%, 1∼4년 7.5%, 5∼9년 4.0%로 경력이 짧을수록 스스로 직장을 옮길 확률이 높았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직이 임금에 미치는 영향이다. 상대적으로 처우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이직에 따라 임금이 평균적으로 상승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재취업 임금이 오히려 떨어진 사람만 놓고 보면, 자발적 이직자 중 임금이 낮아진 사람이 비자발적 이직자들보다 더 많았다. 이직하지 않았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비이직시 기대임금’을 고려하면, 재취업 임금이 기대임금보다 낮아진 사람이 2002년 32.3%로 나타났다. 특히 연령이 낮은 집단에 속할수록 이직에 따라 임금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이직 기간이 길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새 직장을 찾을 때 실질임금이 이직 전보다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때도 비이직시 기대임금을 고려하면 이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이직에 따른 임금이 하락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