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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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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진동’에서 벗어나고파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휴대전화 대신 생활의 여유를 선택한 사람들… 삐삐로 돌아가는 이들도 늘어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신용카드다. 은행거래 기능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 요금도 낼 수 있다. 실시간 교통길잡이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상영되기 전에 미리 본다. 고주파를 발산해 모기를 퇴치한다.

휴대전화 없으면 금단현상…

대한민국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는 서비스들이다.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디지털 방식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은 ‘휴대전화 강국’이다. 총인구 4767만여명(2001년 기준) 가운데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3400만여명이다. 성인 대부분이 쓴다고 볼 수 있다. 요즘엔 중·고등학생들까지도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한국은 1억1900만여개, 124억달러어치의 휴대전화를 외국에 팔았다.

그런데 ‘개나 소도 물고 다닐’ 휴대전화를 고집스럽게 쓰지 않는 이들이 있다. 차병직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한번도 무선호출기(삐삐)나 휴대전화를 쓰지 않은 것으로 이름나 있다. 그의 지갑에는 공중전화 카드 2개가 들어 있다. 생활습관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라는 바쁜 일을 하면서 어떻게 휴대전화를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다 쓰니까 저는 쓰기 싫어요. 그렇다고 제가 ‘컴맹’인 건 아니죠. 다른 사람들이 많이 쓰지 않을 때 워드프로세서나 전동타자기를 쓴 것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닐 텐데 괜히 반대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수시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메모를 확인하지만 늦게 연락이 되어서 불평을 듣는 경우도 많죠. 요즘처럼 찾으면 즉시 모든 것이 연결돼야 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 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도 했다. “전화만 걸려오면 멀리 나가서 받거나 손으로 막고 소곤소곤 10분 이상 통화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얘깃거리가 그렇게 많을까 궁금하다. 한시도 휴대전화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 휴대전화 쓰는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없어지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단다. 일종의 금단현상 아닐까.”

마산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송필경(49·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산하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대표)씨는 휴대전화를 ‘전자수갑’ 또는 ‘전자족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쪽이다. 인턴 시절 그를 잠시도 편하게 놔두지 않았던 아픈 ‘삐삐의 추억’ 때문에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나는 답답한 게 하나도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답답해할지는 몰라도. 술 먹으러 갈 때도 가는 곳이 몇 군데로 정해져 있고. 휴대전화 쓰는 사람들을 보면 밥 먹었냐 안 먹었냐 하는 얘기를 나눕니다. 그런 것까지 꼭 그렇게 물어야 합니까. 쓰고 싶을 때는 옆 사람 것을 빌려서 쓰죠. 처음에는 요금이 비싸서 힘들었지만 요즘엔 담배 한 개피 얻는 것보다 더 쉬우니까. 아, 꼭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합디다.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그때 말고 휴대전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과학저술가 이인식씨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것을 이상하거나 특이한 일로 보지 않는 문화가 아쉽다”고 말했다. 이씨는 인지과학의 명저로 꼽히는 를 쓴 장본인이다. 정보기술 잡지도 만들었다. 컴퓨터와 관련한 신기술을 국내에 여러 번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과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번호 숨기는 ‘얌체 휴대폰족’도

“나만의 소박한 원칙 같은 거죠. 휴대전화가 과소비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여전히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을 너무 의식하고 부화뇌동하는 것 같아요. 저는 자동차 운전도 일부러 안 배워요. 러디즘인 기계파괴운동이랄까.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기술주의’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대해 거부하는 이들이 있어야 세상이 다양해지고 진보하는 것 아닐까요. 기술이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없는 것 같아요.”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이들은 휴대전화가 첨단 소통도구로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준 반면, 여유·기다림·다양성·배려·프라이버시 보호 등의 긍정적인 가치를 해쳤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혼자 일을 하는 교수나 작가 등을 중심으로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문화가 늘어나는 추세다. 휴대전화 대신 이메일을 유일한 소통수단으로 쓰는 이들도 생겨난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경우 이메일과 함께 팩스를 외부와의 소통수단으로 쓰고 있다. 최근에는 ‘얌체 휴대폰족’도 많다. 가족을 빼고는 휴대전화 번호를 일절 공개하지 않고 숨겨놓고 쓰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견디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한솔제지 인사팀 채향석(38) 차장도 몇년을 버티다가 ‘항복’했다. 그는 1997년 말 휴대전화를 6개월 정도 쓰다가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고 보고 휴대전화 사용을 끊었다. 아내는 별 불만이 없었지만 회사일이 문제였다.

하루에 200~300명 삐삐 가입

“상사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가 많았죠. 언제 전화해도 연결돼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직장문화니까요. 결국 지난 2월부터 휴대전화를 다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방 연수원에서 교육을 해야 하는데 저한테 와야 하는 연락이 온통 후배 휴대전화로 쏟아지는 거예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조금 힘들지만 휴대전화 없이도 일상적인 업무는 물론이고 국제행사까지 무리 없이 치러낼 수 있다는 이도 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박정은(32) 간사는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는” 까닭에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 50여명의 활동가 가운데 유일하다. 선물로 준다고 해도 마다한다. 그는 얼마 전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기획하는 일을 총괄했다. “외국 참가자들과는 이메일과 유선전화로 다 해결되는데 행사가 열리고 현장에서 연락이 이뤄져야 하는 2박3일이 문제가 됐죠. 결국 하루는 친언니의 휴대전화를 빌려서 쓸 수밖에 없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더라고요.”
‘즉응즉답형 인간’을 요구하는 휴대전화의 삭막함과 비정함 때문에 휴대전화를 버리고 삐삐로 돌아서는 이들도 최근에 늘고 있다. 삐삐 사용자는 1997년 1500만여명이었지만 지금은 10만명 안팎의 사용자를 유지하고 있다. 사업자도 하나로 통합됐다. 삐삐 예찬론자들은 ‘삐사모’(cafe.daum.net/ilovebeeper)라는 인터넷 카페도 만들었다. 리얼텔레콤의 차승진 고객지원팀장은 “한달에 사용료가 8천원밖에 하지 않는데다 사생활에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이들의 가입이 늘어 최근에는 하루에 200~300명 정도가 가입한다”며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10배 정도 늘어난 수치”라고 말했다.
어쨌든 “남들은 언제라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고 자신은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원형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자화상을 잘 보여주는 생활도구”라는, 휴대전화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롭게 ‘생활의 발견’을 하는 이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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