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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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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다시 아픔이 시작되는 것 같다”

안산 단원고 ‘스쿨닥터’ 지낸 김은지 원장 인터뷰

“녹슬고 망가진 것처럼 우리 아픔도 방치돼왔다”
등록 2017-04-15 11:45 수정 2020-05-03 04:28



세월호와 한국 사회


①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② 오지원 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
③ 박성현 ‘우리함께’ 사무국장
④ 김은지 전 단원고 스쿨닥터


은 김승섭 고려대 교수와 함께 세월호 참사 피해자를 연구하고 치유해온 이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네 번째 주인공은 2010년부터 소아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김은지 선생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7월1일부터 2016년 6월30일까지 단원고 스쿨닥터로 일했다. 3월31일 김승섭 고려대 교수가 김은지 선생이 원장으로 있는 경기도 안산 ‘마음토닥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인터뷰하고 내용을 정리했다. _편집자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어떻게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지원하게 됐나.

2014년 큰아이가 7살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가까이서 돌보고 싶어 일을 쉬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다음날 교육부가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를 통해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봉사할 의사를 찾는다는 전자우편을 (해당 분야 의사들에게) 보내왔다. 이를 보고 그 다음날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전국 소아정신과 의사 70%가 단원고로전자우편을 받고 바로 다음날부터 일하기로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응급 상황이었다. 무조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아정신과는 원래 아이들 학교가 일찍 끝나는 금요일과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 가장 바쁘다. 4월17일이 목요일이었다. 일하는 다른 선생님은 금·토요일에 단원고에 가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먼저 가서 하면 평일에는 다른 선생님이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께 아이들을 부탁드리고 안산으로 갔다.

4월18일 단원고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와서 일할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단원고에 도착했을 때 학교 4층 진료상담실에 소아정신과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상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순찰이었다. 약 20명의 의사가 조를 나눠 시간마다 학교를 돌았다. 교실에서 문을 닫아놓고 애들이 울고 있었다. 삼삼오오 구석에서 울다가 과호흡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4월18일 단원고 교감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모방 자살 우려 때문에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교실 문을 잠그고, 화장실 문을 열어 아무 일 없는지 확인했다. 참사 뒤 휴업 상태였던 1·3학년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할 때까지 계속 순찰을 돌았다. 이후에도 많은 의사가 함께했다. 전국 소아정신과 의사 300여 명 중 200여 명이 단원고에서 봉사했다. 교사 교육과 상담을 하고 학부모도 만났다. 고려대병원에 있던 2학년 생존 학생도 만났다. 자원봉사를 하러 온 의사들은 대부분 개원의였다. 개원의가 병원 문을 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날짜를 정해 평일에 단원고에 왔고 주말에도 와서 일했다. 1·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다시 시작할 때는 모든 교실에 소아정신과 의사가 들어가서 2시간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아이들은 친구를 잃었고 선생님들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몰랐으니까.

2014년 7월1일부터 스쿨닥터로 일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임상심리사 2명, 행정직원 1명과 팀을 이뤄 단원고 ‘마음건강센터’를 시작했다. 좋은 사람들과 팀을 이뤘지만 처음에는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교육청을 비롯한 상급 국가기관이나 지역사회 리더들을 포함해 단원고에 관여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의사들에게는 응급·재난 상황인데 ‘행정’이라는 벽이 높아서 급한 일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참사 트라우마는 삶의 통제권 잃는 기억

단원고 스쿨닥터로 일하면서 생존 학생들을 우선 상담했나.

학생이건 교사건 의학적으로 더 시급한 사람부터 상담하고 치료하는 게 맞다. 1·3학년 학생들에게 정신과 기본검사를 했다. 2학년 생존 학생들은 이미 너무 많은 집단 검사를 받았다. 검사 자체가 부담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따로 검사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바빠서 검사를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1·3학년을 대상으로 위험군·고위험군을 추려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담교사가 1차 상담했다. 상담 뒤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내가 진료했고, 추가 진료가 필요하면 병원으로 보냈다. 생존 학생은 2014년 8월부터 연말까지 임상심리검사를 모두 진행하는 것이 목표였다. 검사 뒤 부모와 아이를 만나 면담하고 결과를 설명해줬다. 문제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트라우마는 예상해본 적 없는 외부 힘에 의해 자아가 손상당하는 경험이다. 삶의 통제권을 빼앗긴 기억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치료받으라고 강하게 요구할 수 없었다. “너희가 원할 때 상담할 수 있어” “너희가 원하지 않으면 3개월에 한 번만 만나면 안 되겠니?’ 이렇게 말하며 지속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스쿨닥터의 장점은 무엇인가.

학교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외부 병원에 있었으면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을 알아도 아이들이 스스로 다시 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아이들은 학교 건물 3층에 있었고 나는 같은 건물 5층에 있었다. 오가면서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담임 선생님들과 2주에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눴고 부모님과도 상의했다. 선생님, 학부모, 친구들과 함께 팀으로 일한 셈이다. 선생님은 교실, 부모님들은 집에서 모니터해주고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상담받도록 해줬다. 아이들도 ‘누가 요즘 힘든 것 같다’며 서로를 모니터링해줬다. 이상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더욱 상담센터가 학교 안에 있어야만 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의사나 상담사에게 깊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자신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상담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차트에 이름을 안 쓰고 번호로만 구별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단원고 선생님이나 행정직원들이 겪은 어려움이었다.

스쿨닥터로 일하면서 교사나 행정직원 모두 너무 힘들고 억울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에서 이분들을 자꾸 죄인 취급했으니까. 상담하면서 그런 이야기도 했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세월호 참사 터지고 제시간에 퇴근 못하셨지요?”라고 물었는데 선생님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말에 동의하지만 밖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아이가 학교에 없다는 사실이었고 피해자 가족이 고통받는 현실이었다. 그들에게는 먼저 세상을 떠난 교사 몫까지 학교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단원고에서 나온 뒤에도 안산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함께 일했던 임상심리사, 행정직원들과 안산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처음 단원고에 들어갈 때 2016년 12월까지는 안산에서 생존 아이들, 피해자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나라도 약속을 지켜야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사니까 환자를 열심히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환자가 있는 곳에서 지내는 게 가장 좋다.

다시 시작될 피해자들의 고통세월호가 인양됐다. 어떤 마음인가.

세월호가 올라오면서 다시 아픔이 시작되는 것 같다.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의 시계는 다시 돌아갈 거고 내 아이를 잃었다는 생각이 배를 보면 더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배가 녹슬고 망가진 것처럼 우리 아픔도 방치됐고, 저 모습이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아이들 모습 같기도 할 테니까.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은 현실적 문제가 해결돼야 정서적·심리적 부분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세월호가 올라오고 진상 규명이 이뤄지면 한 고비가 넘어갈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내 새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참사 뒤 겪었을 애도의 과정이 되풀이될 것이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원하면 지금부터 또다시 지원해야 한다.


<i>“배가 녹슬고 망가진 것처럼 우리 아픔도 방치됐고, 배의 모습이 내 모습, 아이들의 모습 같기도 할테니까.”</i>
한국 사회에 다른 형태의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 그때 같은 일을 할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단원고에 처음 들어갈 때 이 정도 팀이면 6개월에 20명은 완치될 것이라 생각했다. 순전히 일방적인 내 계획이었고 오판이었다. 많은 사람이 아직 치료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고, 사회 상황이 당사자들을 힘들게 했다. 의사가 원한다고 환자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같은 관점에서 피해자 기록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생존 학생 가운데 몇 명이 우울증인지, 몇 명이 PTSD인지 알려달라는 언론과 정부기관의 요구를 많이 받았다. 다른 기관에서 아이들 기록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추적 사례 관리나 데이터 축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외부에 알리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는다. 아무런 기록도 후대에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 피해자도 있다.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무시되고 행정 편의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것은 상처만 키울 뿐이다.

더는 희망이 꺾이지 않기를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2년 동안 학교에서 일하며 희망이 꺾여나갔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환자 치료다. 치료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응급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행정은 달랐다.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거나 규정만 따지면서 시급한 일을 미뤘다. 훌륭한 자원이 많았음에도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해 어떤 일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 여러 정치적 변화를 보면서 다들 기뻐하고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한국 사회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자신도 바뀌어야 한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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