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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그날, 국가는 숨었다

‘세월호 특조위’ 근무했던 오지원 변호사 인터뷰

“금전 보상이 피해자 지원 아냐… 진상 규명 먼저”
등록 2017-02-09 05:49 수정 2020-05-02 19:28



세월호와 한국 사회


① ‘선량한 피해자’가 되라는 명령
② 끔찍한 그날, 국가는 숨었다


은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을 연구하고 치유해온 이들을 연속 인터뷰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 여전히 아프고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다.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두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에서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으로 일한 오지원 변호사다.
그는 세월호 참사 뒤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법률 지원을 맡았다. 2014년 7월 미국으로 잠시 건너가 지내던 중 세월호 특조위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후 세월호 특조위가 2016년 9월30일 강제 해산될 때까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했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가 1월11일 오 변호사를 만나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_편집자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으로 활동한 오지원 변호사가 1월11일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김승섭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으로 활동한 오지원 변호사가 1월11일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김승섭 교수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어떻게 세월호 특조위에서 일하게 됐나.

2014년 4월16일 참사가 터지고 며칠 뒤 경기도 안산 분향소에 혼자 갔는데,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무너졌다.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우리가 아이들을 죽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여러 참사들을 보면서 어른들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른이니까 내 책임이었다.

뭐라도 해야지 생각했지만 당장 하던 일을 정리 못했다. 그 무렵 아이들이 꿈에 나왔다. 집 앞 놀이터에 교복 입은 아이들 수십 명이 우리 집을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나와서 함께하자는 듯이. 마침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안산에 머물며 법률 지원을 할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갔다.

영정사진 보는 순간 무너졌다 그때부터 안산에서 변호사로 유족을 만났는가.

막상 안산에 가니 유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힘들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성폭력 피해자와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 등 격노한 상태에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나봐서 사람을 무서워하진 않는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머무는 천막에 들어가서는 막상 무슨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더라.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광주지법에서 진행되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 재판에 피해자들과 함께 방청하러 갔을 때다. 한국에선 법조인이 재판에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 특히 피해자에게 필요 이상의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세월호 재판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많이 걱정했다.

그래서 재판부와 검찰 쪽에 재판 시작 전에 ‘시신’이라는 말 대신 ‘아이들’이라 말해달라고, 피해자 가족분들을 ‘방청인’이라고 딱딱하게 부르기보다 ‘아이들의 어머님’ ‘아버님’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냈다. 화가 난 부모님들이 말하려 하면 내쫓지 말고 시간 한도 내에서 최대한 허용해달라고도 했다. 변호인단 의견에 검사나 판사들이 고마워했고 실제 그것을 반영해주었다.

오지원 변호사는 참사 직후 안산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법률 지원을 했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이 정부가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면 ‘아무리 그래도 세월호 참사를 두고서 한국 정부가 그럴 리가 없다’고 안심시켰다. 세월호 피해자들을 음해하는 카카오톡 문자가 마구잡이로 돌아다닐 때 피해자들이 앞장서서 고발하면 여론이 나빠질까봐 망설였다. 그는 자신의 순진했던 행동을 두고 계속 후회하고 자책했다.2014년 7월 초부터 남편 직장 문제로 미국에 가야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호 특별법 통과가 미뤄지는 것을 보며 너무 괴로웠다. 최근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업무수첩(비망록)을 보니, 정말 이게 나라인가 싶고 미치겠더라. 업무수첩을 보면 세월호 특별법이 헌법에 반한다는 논거를 청와대에서 적극 제공하면서 여당, 법무부가 협조하라는 식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또 좌익들의 기관 진입 욕구가 강해지니까 우파를 결집해야 한다거나, 특조위원에 자기 쪽 정치 지망생을 앉혀야 한다는 내용도 나온다.

심지어 당시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 규명에 사활을 걸었던, 그것만이 희생자들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던 피해자들을 분리하고 이간질하려는 내용도 있다. ‘유가족 폭행 사건’이나 ‘세월호 일반인 피해자들의 유족인 유경근 대변인 고소 예정’ 등의 내용도 나온다. 청와대가 피해자들의 내부 갈등을 적극 부채질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막으려 했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무원 신분 숨긴 공무원들 세월호 특조위에서 피해자 지원 점검 과장으로 일했던 것 중 기억나는 게 있나.

공무원도 대부분 대형 참사를 처음 겪었다. 당시 참사 현장에 투입된 공무원들을 만나보면, 자신들도 피해자 지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더라. 아무 준비나 훈련 없이 곧바로 투입됐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심지어 참사 당일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화가 난 피해자 가족들이 몰려들자, 공무원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노란 점퍼를 벗어버렸다.

자신이 공무원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나.

그렇다. 피해자 가족들은 참사 초기 머무른 진도체육관에서 상황을 물어볼 공무원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공무원에게 물어보면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피해자들 중에 도와드린 분도 많다’고 했다. 어찌된 일인지 확인해봤다. 당시 중앙정부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과 진도군청 공무원들이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고 왔는데,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가 커져 공무원들을 몰아붙이자 어느 순간 그 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결국 누가 공무원이고 누가 기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르는 상태가 됐다.

참사 현장 지원을 위해 파견된 공무원들도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중앙정부 부처에서 공무원들이 진도체육관으로 파견될 때 거의 맨몸으로 왔다. 펜부터 노트북까지 모든 사무집기를 현장에 있는 진도군청 공무원이 준비해줘야 했다. 당시 피해자 지원은 진도군청 공무원들이 주로 담당했는데, 이들은 중앙정부 부처 공무원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영국의 재난 대응 매뉴얼 ‘인도적 지원에 관한 정부 지침’(Humanitarian Assistance in Emergencies: Non-statutory guidance on establishing Humanitarian Assistance Centres)을 보면 공무원들이 재난 현장에 필수적으로 가져가야 할 물품 목록(노트북, 펜 등)이 있고 재난 현장에서 24시간 내, 48시간 내 조처해야 할 사항이 아주 세심하게 적혀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 때 생존학생들이나 유가족들은 아무 때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취재에 무방비로 노출됐는데, 이를 막아주는 공무원이나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미국이나 영국 매뉴얼에는 피해자들의 사생활을 언론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원칙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별도의 리셉션 장소 마련 등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그들이 천재여서 처음부터 그런 내용을 매뉴얼에 담은 게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여러 재난 대응 경험을 버리지 않고 축적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매뉴얼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에선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하는지가 아니라, 대통령이나 장차관이 방문했을 때 브리핑과 의전을 어떻게 할지가 재난 대응 매뉴얼의 초점이다.

참사 당일 오전 9시51분부터 10시44분까지 1시간 동안 5차례 진행된 해경과 청와대 핫라인 통화 내용만 봐도 그렇다. 그때 청와대가 해경에 거듭 요구한 것이 VIP가 볼 세월호 참사 영상이었다. 대통령, 고위 공직자에게 가져다줄 자료부터 요구한 것이다. 그런 관점이 한국의 재난 대응 매뉴얼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일본·미국에서 재난 대응 실태 조사
2014년 4월25일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실종자 수색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4년 4월25일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이 실종자 수색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세월호 특조위 활동으로 재난 대응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다녀왔다.

해외에선 재난 대응 매뉴얼의 관점이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은 ‘인도적 현장 지원’ 개념도, 관련 법령도, 매뉴얼도 없다. 물리적 대응 중심으로 생각한다. 홍수가 나면 둑을 쌓고 집 무너지면 새로 짓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의 재난 대응은 물리적 사항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돌봄이나 피난소에서의 지원 등을 우선적으로 살핀다.

미국 출장 조사를 하면서, 재난 현장 경험이 풍부한 공무원 출신의 조지프 바베라 교수를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만났다. 그는 “재난 현장에선 비극적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 내용을 어떻게 상처를 덜 주면서 정확히 전달할지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교육은 재난 대응 공무원들이 훈련받는 기관인 EMI에서 이뤄진다. EMI에는 재난 피해자에게 어떤 언어와 표정으로 말해야 하는지 훈련하는 곳이 있었다. 브리핑 연습을 할 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게 시설을 만들어놨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많은 실패를 했다. 미국의 경우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지정한 피난소에 해일이 밀려와서 많은 사람이 숨졌다. 당시 미국 정부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그 경험을 버리지 않고 더 나은 재난 대응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았다. 실패의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과 백악관 관계자들의 보고 내용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다. 카트리나 종합보고서(A Failure of Initiative)에선 ‘대통령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듣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해외에서는 재난 피해자가 모인 현장에서 정부가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인적 분류다. 누가 공무원인지, 피해 당사자인지, 피해자 가족인지 구분돼야 적절한 지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현장은 달랐다. 공무원과 기자, 사복 경찰이 섞여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중간보고서에는 몰래 대화를 엿듣고 뭔가 계속 기록하지만 신원을 물으면 답하지 않던 사복 경찰과 해경 정보과 직원들이 참사 당일부터 2014년 4월25일까지 매일 46~130명씩 진도체육관 등에 파견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기록돼 있다. 끔찍한 재난 현장에서 국가는 숨어 있었다. 특조위 찾아온 김관홍 잠수사세월호 참사의 직접적 피해자 말고 간접적 피해자도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관홍 잠수사가 가장 기억난다. 김 잠수사는 세월호 참사 수습을 지원하다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참사 직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국회와 여러 정부 부처를 떠돌다 지친 상태로 특조위에 찾아왔다. 떼쓰는 민원인 취급을 받다 특조위에 온 것이다.

얼굴이 새카맣고 키도 작은 사람이 화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민간 잠수사 지원 이야기를 할 텐데 못해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안 된다고 말해라. 지금 인생이 바닥으로 떨어져 대리운전을 하면서 버티고 있다. 계속 호소하고 다니는 것도 너무 힘들다.” 면담을 마친 뒤 김 잠수사가 돌아가는 길에 도넛을 건넸더니 “저는 트라우마 때문에 소화가 안 돼서 잘 못 먹어요.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아이들 갖다 주세요” 했더니 그제야 웃었다.

민간 잠수사들은 특별법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었다. 심리치료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참사 수습 충격을 잠수사들끼리만 끙끙 앓으며 버텨왔다. 그 와중에 제일 경험 많은 잠수사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동료 잠수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기소까지 당한 상태여서 국가에 대한 배신감과 트라우마가 심했다.

세월호 특조위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잘한 것 중 하나가 민간 잠수사분들을 인격적으로 대한 것이다. 이분들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왔는데, 직원들이 정말 온 힘을 다해 반갑게 맞이했다. 여러 노력을 해서 정부가 잠수사들의 부상 치료 지원을 재개하도록 하고, 심리치료가 필요한 분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연결해주었다.

15년 뒤에도 주검 수색하는데…선체 인양이 미뤄져 미수습자 가족들의 고통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출장 조사 때 뉴욕대학교 랑곤의료센터(NYU Langone Medical Center)를 방문했다. 병원 관계자는, 9·11 테러의 경우 2001~2002년 주검 수색 작업이 마감됐다가 5년 뒤 인근 공사 과정에서 뼈조각들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2006년부터 3년간 새롭게 주검을 수색·수습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2007년에는 우연히 하수구에 묻혀 있던 뼈조각을 찾아 신원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지역에서 공사를 시작할 때는 주검 수색을 먼저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되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피해자 지원’이란 개념은 굉장히 광범위하다. 한국에선 돈 주는 것을 피해자 지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은 대통령만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법도 바뀌고 매뉴얼도 생기고 공무원도 그에 따라 훈련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금전 보상이 절대 피해자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재난을 언제든 당할 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다. ‘돈 줄 테니까 조용히 해’라는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생각해봐야 한다.

피해자 지원의 가장 기본은 진상 규명이다. 진상 규명이 조속하게 이뤄지고 개개인부터 정책까지 광범위하게 잘못된 부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활동이 정권 입맛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안정적 시스템을 통해 시급히 보장돼야 한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제대로 살피고 기록하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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