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점을 빼면, 당신과 세월호 참사는 관련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난 단원고나 세월호 희생자들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대학생이었다. 그래도 뭔가 돕고 싶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땐 몰랐다. 세월호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처음 접한 일은 세월호 희생 학생의 형제자매를 돌보는 ‘멘토링’이었다. 이전까지 남을 위해 일한 적이 없었지만, 8개월 동안 함께한 아이들과의 추억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한 노란 팔찌가 나오던 날 함께한 아이들이 부끄러운 듯 새침한 얼굴로 손목에 팔찌를 채워준 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멘토링을 통해 타인을 돕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깨달은 뒤 2년 가까이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를 바꾸는 정치에 관심 갖게 돼 더불어민주당 보좌진 협의회에서 주최한 청년 보좌진 양성 과정에 지원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세월호와 함께한 박주민 의원실이었다. 면접에 참석한 한 보좌관님이 2년 동안 차고 다녀 여기저기 낡고 찢어진 내 팔찌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의원실에 있는 새로운 팔찌를 차며 다짐했다. 첫 번째 팔찌를 찼던 내 역할은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팔찌를 차는 내 역할은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난 지금 두 번째 팔찌를 차고 있다. 이것도 언젠가 낡아 끊어지면 세 번째 팔찌를 차야 할 것이다. 그때 팔찌를 차면서 난 어떤 다짐을 하게 될까.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장규진 잊을 수 없는 그 환자이른 점심을 먹으며 세월호 참사를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그날’의 기억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사고 몇 달 뒤, 세월호 사고로 아들을 잃은 단원고 학부모와 건강상담으로 만나게 됐다. 본격적인 진료가 아닌 일반적인 건강상담을 위해 순회 방문한 회사에서 이뤄진 우연한 만남이었다.
희생 학생의 아버지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며 회사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에게 값싼 위로를 전할 순 없었기에 그저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밖에 해줄 게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의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그는 “아내는 집 안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들고 있던 건강검진 결과지에서 확인한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충격적이었다.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아내가 거의 드시지도 않고 잘 주무시지도 않지요”라고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졌다.
이후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은 보상을 많이 받았다. 세월이 지나면 잊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얘길 할 때마다 내가 만난 유가족의 폐허가 된 삶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회 되면 얘기한다. “자기 자식이 물속에 빠져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본 사람에게 돈이 무슨 소용 있냐”고.
난 그다지 성실한 의사가 아니어서 기억나는 환자가 많지 않다. 그러나 아이를 잃은 이 아버지만은 평생 기억할 것 같다. 다른 곳으로 병원을 옮긴 탓에 다시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2016년 겨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탄핵을 위해 함께 추위에 떨며, 유가족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계속 기도했다. “어떤 위로도 소용없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응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라고 말이다.
김현주 특조위의 끝나지 않은 조사세월호 참사가 터진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에서 기간제 직원으로 일하며 조사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조위가 설치된 것은 2015년 1월1일이었다. 그러나 조사관들이 첫 출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해 7월27일이었고, 다시 또 한 달이 지난 8월 말에야 예산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특조위 활동을 지원하기는커녕 세월호의 진실된 기록을 수집해 국민에게 알리는 기회를 몇 번이나 방해했다. 해당 정부 부처에서 자료 제공을 거부해 조사관들이 교대로 부처에서 대기하며 날밤을 새우기도 했다.
내부의 방해도 있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해 모인 조직이었지만, 조사를 방해하러 나온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내부의 적을 두고 일하느라 조사 내용이 새나갈까 전전긍긍했고, 몰래 회의를 하기도 했다. 특조위는 약 51만4천 장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조사관들이 이 자료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물 관리를 조사관 한 사람이 짊어지고 수행했다. ‘특조위가 세금을 잡아먹는다’ ‘특조위를 없애야 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옆에서 이들을 지켜본 처지에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2016년 9월30일 특조위는 해산됐다.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한 조사관들은 급여도 없이 출근투쟁을 하며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나 특조위 사무실은 결국 정리됐고, 현재 국민 조사단을 만들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힘든 여건에서도 세월호의 진실을 남기려는 사명감과 열정을 가진 조사관님들에게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말을 전하고 싶다.
황준혁 ‘세월호 세대’의 다짐2014년 4월16일, 그들이 경기도 안산에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갈 때, 나 역시 전남 목포에서 해남으로 수련회를 가고 있었다. 오전 9시에 출발해 영암군을 지나갈 무렵 버스 안에서 처음 사고 소식과 마주쳤다. 심하게 기울어진 세월호의 모습을 뉴스로 바라보던 나와 친구들은 큰 피해 없이, 큰 희생 없이 사고가 제대로 수습되기를 바라며 수련원에 입소했다.
4월17일 밤, 갑자기 지도사 선생님들이 걷어갔던 휴대전화를 학생들에게 돌려줬다. 세월호 참사로 걱정하실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안부를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돌려받은 휴대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으시자마자 “현재 세월호가 바다에 빠져서 수백 명이 배 안에 갇혀 있다. 너희의 안전이 너무 걱정스러웠다”고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무척 걱정됐다.
4월18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뉴스를 확인한 나와 친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구조 작업이 완료됐을 것이라는 바람과 달리 세월호의 상황은 처참하고 잔혹했다. 페이스북에서, 네이버에서, 텔레비전 뉴스에서 확인했던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참혹한 재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4·16 기억은 나를 자연스럽게 기억의 현장으로, 추모의 공간으로 향하게 했다. 우리 학교에서 목포대교를 건너 10분만 차를 타고 가면 인양된 세월호가 머무르는 목포신항이 나온다. 목포 시내에 위치한 유달산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세월호 모습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거리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가방에는 조그마한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도심을 가르는 큰길 전봇대에도 언제나 추모 메시지가 담긴 노란 리본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월호 흔적이 곳곳에 머무른 이 거리에서, 이 도시에서 나는 3년 동안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고 경험한 19살 ‘세월호 세대’ 청소년이다. 긴 세월의 기다림이 절대 무용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처절한 참사의 현장과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모두의 생명과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끝없이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며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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