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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피해자’가 되라는 명령

세월호와 한국 사회 ①세월호 생존 학생·학부모 심층조사 진행한 김승섭 교수
등록 2017-01-10 15:57 수정 2020-05-03 04:28
그들은 그날을 ‘탈출’로 기억했다.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를 뽑아 복도로 내달렸다. 소방 호스를 허리에 묶어 기울어진 선실을 빠져나왔다. 구명조끼를 꺼내 나눴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생존 학생들은 그렇게 세월호를 탈출했다. 적어도 배 밖에서 건네는 도움의 손길 따윈 없었다. 탈출은 그날로 멈추지 않았다. 75명의 생존 학생들은 참사 1천 일 동안 수많은 도돌이표를 만나야 했다. 정부와 언론, 지역사회와 병원에서 또다시 탈출해야 했다.
은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을 연구하고 치유해온 이들을 연속 인터뷰한다. 그들을 만나 여전히 아프고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다.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우리 모습에서 한국 사회의 민낯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더라도 들어야 할 까닭이 있다. 또 다른 비극을 마주했을 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다. 그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의뢰를 받고 단원고 생존 학생 19명과 학부모 21명을 만나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인터뷰는 김 교수가 직접 인터뷰어로 나선다. 이 이야기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마주한 우리의 이야기다. _편집자

피해자 조사와 연구는 언제 시작했나.

2016년 1월부터다. 처음 안산에 갔을 때 ‘이제 와서 무슨 조사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존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중이었다. 그 중요한 때 다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도록 한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내가 단원고 학생이라면 인터뷰를 하고 싶을지 먼저 생각해봤다. 바로 대답이 나왔다. ‘아니다’. 너무 괴로웠다.

2년이 훌쩍 지났어도 피해자의 아픔은 여전했나.

한 생존 학생의 어머니는 아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 답답해서 혼자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 그때 멀리서도 알아차릴 정도의 흙빛 얼굴로 걸어가는 사람을 마주했다. ‘유가족이구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분을 스쳐지나가는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고 말했다. 아픈 이야기가 셀 수 없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그래도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대구 지하철 참사 관련 보고서를 살펴봤다. 정부 차원의 지원 기관이 자신들의 실적을 자랑하는 내용만 있었다. 피해자와 목격자의 목소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가면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겠다고 생각했다.


<i>“해경은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는 도와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누구도 ‘구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탈출’이었다.”</i>
세월호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학생들이 순진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항해 전문가인 선원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은 ‘내가 움직이면 구조가 늦어지고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학생들은 선실 내 가구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사로 이어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학생들은 해경을 만나 “저 뒤에 애들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경은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는 도와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누구도 ‘구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탈출’이었다.

상처를 준 것은 국가만이 아니었다. 한 방송국 기자는 세월호 참사 당일 생존 학생에게 다가와 친구의 가족이라고 속이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물었다. 대답은 그대로 녹음돼 방송 전파를 탔다. 물에 빠진 휴대전화를 고쳐주겠다며 가져가 안에 있던 동영상을 허락 없이 방송에 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사 당일만이 아니었다. 언론이 앞다퉈 정확하지 않은 보상 금액과 대학 특별전형 사실을 보도하면서 ‘단원고’ 출신은 낙인이 되었다. ‘과도한 특혜’라는 수군거림은 피해자들의 옆구리에도 똬리를 틀었다. 생존 학생들의 부모는 주변에서 ‘운 좋게 (살아) 나와서 저렇게 혜택을 받는다’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다. 그 순간은 “진짜 막 살을 잡아 뜯는 느낌”으로 남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서를 남긴다 탈출 이후에도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것 같다.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메커니즘이 있다. 정부는 각종 지원 대책을 피해자와 상의하지 않고 언론에 알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풀려서 주변에 퍼뜨린다. 심지어 이웃마저 세월호 피해 가족에게 ‘얼마 받냐’고 묻는다. 정작 피해자들이 지원받으려고 주민센터 등에 물어보면 해당 기관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정부와 언론, 지원기관, 지역사회 등이 모두 맞물려 있다.

정부가 가장 큰 문제인가.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가 무능했고 컨트롤 타워가 없었다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다. 책임지는 사람의 부재는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만으로 참사 이후 나타난 문제점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성급하게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 지역사회의 편견, 학교에서의 부정적 경험. 민간과 공공 영역 곳곳에서 한국 사회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i>참사가 남긴 후유증은 계속된다. 하지만 생존 학생들은 이 모든 증상이 세월호 참사 때문이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치료받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앓아눕고 숨을 거둬도 산업재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처럼.</i>
생존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고대 안산병원(2주)과 중소기업연수원(8주) 치유 프로그램은 도움이 됐나.

트라우마는 삶 자체가 위기에 처했던 경험이다. 치유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신뢰를 쌓으며 다가가야 한다. 폐렴 환자한테 항생제를 주입하는 방식으로는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치유 프로그램은 대부분 성급하게 진행됐다.

연수원 프로그램을 보면 오전에 ‘상실의 고통 치유’를 한다. 오후에 바로 ‘아픔에서 희망으로’라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전에 평생 잊지 못할 참사 경험을 이야기하고 오후에 그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하자고 하는 식이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프로그램이 반복되면서 학생들은 정말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생존 학생은 참사 이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유서를 남긴다. 또 다른 학생은 영화관이나 노래방에 들어가면 비상구부터 찾는다. 여느 10대들처럼 ‘까르르’ 웃다가도 주변을 둘러본다. 웃어도 되나 두렵다. 큰소리가 나면 다리가 떨리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두통과 강박, 우울증도 흔하다. 참사가 남긴 후유증은 계속된다.
하지만 생존 학생들은 이 모든 증상이 세월호 참사 때문이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치료받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악성림프종으로 앓아 눕고 숨을 거둬도 산업재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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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고통을 증명하라고 말하는 사회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강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를 동일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같은 참사를 겪은 뒤 서로 다른 이유로 상처받으며 시간을 견뎌냈다. 그래도 공통적으로 짚는 부분이 있다. 가장 기억해야 하는 점이 세월호 지원 대책에 포함된 대학 특별전형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특별전형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와 언론의 태도가 문제였다. 관련 뉴스 기사에 ‘친구는 죽었는데 너는 좋은 대학 가서 좋겠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것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단원고 출신이 낙인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한국 사회가 재난 대응 과정에서 반드시 바꿔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유가족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보상이나 여타 지원 내용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과장해 보도했고, 참사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운 좋은 사람 취급했다. 정부와 언론이 국민과 피해자를 이간질했다.

얼마 전 일본의 재난 연구자 한 분을 만났다. 일본의 경우, 쓰나미 등 대형 재난을 겪은 지역에는 정부가 여러 지원을 수행하지만, 누구도 그 내용을 입에 올리지 않고 언론도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원 내역을 국민과 공유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도움되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재난 당사자가 애도하고 치유에 집중하도록 사회가 침묵해야 한다. 그게 한 사회의 감수성이고 실력이다.

지역사회 분위기는 어땠나.

2014년 생존 학생들이 2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나오는데 한 지역 주민이 ‘단원고 3학년이니, 2학년이니?’ 물었다. 2학년이라고 대답하니까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학생들이 구경거리가 된 셈이다. 평소 가깝게 지낸 이웃도 정부 지원을 ‘세월호 빽’이라고 했다. 아이가 살아왔는데도 지원을 받으니까 운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지역사회는 세월호 트라우마 치유 과정에서도, 악화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트라우마가 큰 만큼 의료 지원이 절실했을 것이다.

한 생존 학생이 갑자기 몸 반쪽에 마비가 와서 걷지 못했다. 병원에 갔더니 세월호 사고 후유증과 관련 없다며 치료를 못하겠다고 했다. 세월호 사고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세월호지원법과 시행령에는 2016년 3월28일까지 의료지원금을 받게 돼 있다. 하지만 자신의 증상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 있다는 것을 환자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병원이 치료 뒤 의료지원금을 못 받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세월호 참사 문제만은 아니다. 산업재해 노동자가 암이나 만성질환에 걸렸을 때 직업과의 인과관계를 법정에서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과 같다. 소방관이 화재 진압 현장에서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암에 걸려도 공무 중 부상 처리를 받기 쉽지 않은 것과 같은 경험이다. 피해자 개인에게, 자원과 자본이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인과관계 증명의 부담을 떠넘기는 한국 사회의 취약함이 세월호 참사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희망적 사례는 없나.

단원고에 상주하며 학생들의 심리 상담을 한 스쿨닥터(정신과 의사)와 ‘아름다운 배움’이라는 대학생 단체가 도움이 됐다. ‘아름다운 배움’은 멋진 프로그램을 짜오거나 생존 학생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겠다는 강박을 갖지 않았다. 단지 생존 학생들과 함께 놀고 치킨과 피자를 먹으면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고민 상담도 했다.

모두 공통점이 있다. 학생들을 채근하지 않고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왔으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충분한 신뢰를 쌓기도 전에 ‘어떤 상처인지 입 밖으로 말해야 트라우마가 극복된다’며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네가 필요할 땐 언제나 곁에 있겠다’며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미소짓지 말아야 하고 화내면 안 되고 “저분들(유가족) (살아 있는) 나나 내 친구들을 보면 피눈물이 날 거 같아요. 그래서 눈에 안 띄려고 하는데…. 솔직히 진짜 저 같아도 가슴이 뭉그러질 거 같아요.” 생존 학생들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느꼈다. 어쩌면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감정이다. 다만 함께 품고 갈 수는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확히 그 반대로 작동했다. 그들에게 ‘선량한 피해자’의 롤모델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우리가 피해자들을 가뒀다.피해자들을 보며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생존 학생들의 군 입대 관련 병무청 설명회가 있었다. 나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병무청에서 일반 입대자와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월호 생존 학생을 어떻게 배려하겠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부모님이 원하는 게 면제나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트라우마는 짧은 시간 검사하는 것만으로 놓치는 게 있으니까 좀더 주의를 기울여 정확하게 신체검사를 하도록 조치해달라는 말은 하실 수 있잖아요’라고 부모들에게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답은 ‘경험상 내가 그 말을 하면 내일 언론에 나온다’였다. 그 정도 말도 특혜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도된다는 뜻이었다.

당사자와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제대로 지원하는 데 가장 중요할 텐데, 마치 거미줄에 얽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같았다. 정부 지원은 내용과 방식에 상관없이 항상 감사히 받아야 하고, 가끔 웃을 일이 생겨도 미소짓지 말아야 하고, 화내면 안 되는 선량한 피해자 모습을 강요받고 있었다.

참사 피해자 조사 과정에서 느낀 한국 사회의 문제는 뭔가.

어떤 재난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살아온 역사와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피해자들도 각자 입장이 다르다. 모든 피해자가 끝까지 하나로 뭉치는 경우는 드물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생존 학생 가족과 유가족 간 갈등이 있다.

유가족들은 생존 학생을 볼 때마다 자신의 아이가 떠올라 슬프고 화날 때도 있다. 생존 학생 가족은 세월호 집회에서 사회자가 유가족만 소개하고, 앞자리에 먼저 앉히는 모습을 보고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재난에서 나타나는 삶의 복잡성이다. 피해자와 일반 국민의 갈등도 당연히 존재한다.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는 갈등을 더 부추겼다. 유가족과 생존 학생 가족을 나누고, 피해자와 국민을 떼어냈다. 우리 사회 역시 그 골을 좁히지 못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안 된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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