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드러나는 대통령의 헌정 문란 행위는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직무 수행과 연루된 자신의 범죄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국익을 수호하기는 어렵다. 국격이나 외교적 위신 역시 이미 치명적 손상을 입었음은 물론이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청와대는 책임을 부인하며 ‘퇴진 불가’ 입장을 고수한다. 교착된 현재의 정국을 타개할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며 헌법 질서에 부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진 사퇴는 절대 없다”는 대통령의 입장은 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다른 협상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할 정도의 정무적 판단력을 구비한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애초 이런 수준의 국정 사유화, 헌정 파괴 행위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대통령의 ‘자발적’ 결단에 의존한 해법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통령 의사와는 무관하게 직무를 정지시키고 파면할 수 있는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청와대 ‘탄핵할 테면 해보라’ 태세인 이유그러나 탄핵 절차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절차의 전반부(탄핵 소추를 ‘제기’하는 과정)는 국회가 주도권을 갖는 정치적 프로세스이지만, 탄핵 심판 여부를 결정하는 후반부 절차는 헌법재판관들이 수행하는 법률적 판단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탄핵 심판에는 어쩔 수 없이 무슨 법 몇 조를 대통령이 위반했냐 아니냐를 하나씩 놓고 따지는 ‘미시적’ 판단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하늘과 같이 고귀한 국민의 신임을 가볍게 배신하고, 자기 ‘친구’ 최씨 일당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골몰해온 대통령의 불충(不忠)과 정치적 파산이 재판관들의 미시적 법률 판단만으로 과연 제대로 다뤄질 수 있을까.
탄핵 절차를 통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대통령의 잘못은 대통령이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상당한 규모의 부정과 비리, 국정 사유화 및 헌정 문란 행위 중 일부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재판관의 법률적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탄핵 심판 절차가 안고 있는 첫 번째 한계가 이것이다.
좀더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탄핵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회부되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 소추자(검사) 역할을 하도록 돼 있다. 현재 국회 법사위원장은 새누리당 소속 권성동 의원이다. 그는 여야가 이미 합의한 최순실 조사에 대한 특검법조차 반대하며 법사위에서 특검 법안 심의를 못하도록 한 차례 가로막은 바 있다. 과연 그가 헌법재판관들 앞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하며 충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소추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까?
또 하나의 한계는 임기와 탄핵 시기에 관련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임기의 마지막 1년가량만을 남겨둔 시점이다. 탄핵 소추에 필요한 준비 작업과 증거 자료 취합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소추가 이뤄져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회부된 다음에도 탄핵 여부 결정은 길게는 6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헌법재판관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때쯤이면 대통령을 임기 만료 전에 파면시킨다는 탄핵 절차의 의의가 대부분 퇴색하는 측면도 있다. 현재 청와대가 “탄핵할 테면 해보라”는 입장을 은근히 내비치는 이유는 현 상황에서 탄핵 절차의 이런 한계들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가? ‘강제적 탄핵’ 아니면 ‘자발적 퇴진’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형세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이러한 정치적 노력이 결국 헌법에 규정된 탄핵(강제적 파면) 절차를 신속하게 달성하는 데 필요한 선결 요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고 유용할까?
첫째,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은 상태로 머물도록 하고 앞으로 더 낮아지도록 정치적 지형을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씨처럼 돌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영수회담을 시도하거나,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야 3당이 총리 후보자를 합의 천거해 총리가 임명될 경우, 일단은 마치 국정이 수습되고 회복되는 듯한 ‘환상’이 생기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다소 반등하게 된다. 이 경우 대통령 퇴진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 지지율이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퇴임이건 탄핵이건 성사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든다.
둘째, 야당의 지지율을 높일 필요가 있다. 국회의 정상적 권한인 국정조사, 청문회 등을 통해 대통령의 비리와 헌정 문란 행위를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한다. 헌법이 정하는 국회의 고유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행정부를 견제하고 대통령이 잘못하면 그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문회나 국정조사도 일정한 한계가 있고 무한정 지속될 수도 없다.
야당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지지율을 높이는, 바람직한 또 하나의 방법은 중요한 정책적 가치가 있는 의제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주도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야 3당이 주도해 대통령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퇴진하건, 탄핵으로 파면되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건 다음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데 현행 대통령 선출 방법은 개선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방법에 관해 공직선거법은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가 당선인이 되도록 정해두고 있다(제187조 1항). 이처럼 단순 다수 득표자가 당선인이 되는 제도에서 그동안 야권은 매번 ‘후보 단일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다.
당내 경선 과정과 달리, 하나의 후보를 선정할 어떤 규칙이나 합의된 절차가 없는 이 과정에서 야권 후보들은 서로에게 흠집을 내고,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은 실종됐다.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고조되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참담한 상황이 선거 때마다 반복돼왔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필요한편 단일화가 안 되고 여러 후보자가 팽팽히 경쟁할 경우 심지어 유효투표의 20~30%밖에 얻지 못한 사람이 ‘다수 득표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통령 당선인이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이런 당선자가 과연 민주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통령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이런 고질적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대통령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면 그를 당선인으로 하면 되고, 과반수 득표자가 없다면 상위 득표자 2명에 대해 결선투표를 해서 당선인을 정하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해온 프랑스가 이렇게 대통령을 선출한다.
결선투표제 도입은 개헌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다. 일반 법률인 공직선거법의 한 문장(제187조 1항)을 개정하면 당장 시행할 수 있다. 국회 다수를 점하는 야 3당이 결선투표제 도입을 성사시키면 야당 지지율은 높아지고,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떨어질 것이다. 새누리당이 집권당이 될 가능성이 줄어들면 지금의 지지율을 더욱 낮추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검찰이나 특검의 수사,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주도하는 국정조사와 청문회, 그리고 언론이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탐사보도 등을 통해 박근혜씨의 비리가 더욱 드러나고, 야 3당의 지지율이 상승하면 새누리당은 더 이상 박근혜씨를 옹호하기 어렵게 된다.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씨와의 연결이 자신에게 이득보다는 손해가 크다는 점이 분명해지면 새누리당의 다수 의원이 박근혜씨의 탈당을 요구하고 그를 ‘버리는’ 시점이 올 수밖에 없다. 탄핵은 그때 실행해야 한다.
탄핵 절차는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하는 모양새가 갖춰질 때까지 인내하면서, 그런 정치적 지형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인 다음에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를 턱걸이로 넘기고 3분의 1에 가까운 의원들이 ‘결사반대’하는 모습으로 탄핵 소추가 겨우 국회를 통과할 경우,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은 탄핵 절차를 헌법재판소에 가지고 와서 판단을 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에 불과하다. 탄핵 소추가 겨우 국회를 넘어왔는데 헌법재판소가 선뜻 탄핵을 결정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마치 커트라인을 겨우 넘겨 간신히 입학한 신입생이 당장 자신이 우등상을 받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탄핵은 헌법에 정해진 절차이긴 하지만, 탄핵 소추 요건이 ‘형식적’으로 구비됐다고 경솔하게 추진하면 성사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낮다.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탄핵에 찬성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정치적 준비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 최소 요건(재적의원 3분의 2 찬성)만을 겨우 채워서 탄핵 사건을 헌법재판소에 넘기는 것은 정치권이 자신이 해야 할 숙제를 하지도 않고 헌법재판소에 이를 대신 해달라고 떼쓰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법이 정치를 대신할 순 없다”비록 지금은 대통령이 “퇴진 불가” 입장을 고수하지만, 새누리당이 돌아서고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탄핵에 찬성하는 시점이 오면 대통령은 어차피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그 상황이 오면 퇴진이건 탄핵이건 의미 있는 차이는 없어진다.
헌법에 정해진 탄핵 절차가 헌정 위기 상황을 헌법 질서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탄핵은 정치권이 국민의 희망과 의지를 제대로 받들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정치적 노력을 충분하고 충실히 다했을 때만 성사될 수 있다. 탄핵 소추를 의결해 헌법재판소에 던져놓기만 하면 ‘법’과 ‘재판관’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헌법적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적 프로세스가 먼저 충실히 작동돼야 한다. 법이 정치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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