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에는 세 개의 ‘성’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명으로 축성된 화성, 수원에서 자란 축구선수 박지성, 그리고 글로벌 기업 삼성.
삼성전자는 수원시청 근처에 수원사업장을 두고 있다. 디지털미디어 사업 연구인력 등 2만9500여 명이 근무한다. 수원시 바로 아래에 있는 화성시와 용인시에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과 기흥사업장이 있다. 반도체 생산라인이다. 서로 맞붙은 두 사업장에만 3만1700여 명의 직원이 있다.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전자의 국내 사업장 9곳 중 3곳이 직선거리로 불과 5~6km를 사이에 두고 몰려 있다.
지역의 자랑이라는 그 삼성이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1월27일 오후 1시22분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이 있는 화성사업장에서 유독물질인 불산이 누출됐다. 삼성은 작업자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친 다음에야 관리·감독 기관인 경기도에 누출 사실을 보고했다. 누출 25시간 만이었다. 경기도 역시 보고를 받고 3시간이 지난 1월28일 오후 5시40분에야 환경부·한강유역환경청·소방재난본부·보건환경연구원·경찰청 등 유관기관에 사고 사실을 알렸다. 결국 화성사업장과 맞붙어 사는 지역 주민 수만 명은 28시간이 지난 이튿날 오후 늦게야 뉴스를 통해 불산 누출로 작업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과 넉 달 전 대구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도 불산 유출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 5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쳤다. 인근 주민 모두가 집을 버리고 대피해야 했다. 불산은 건강위험성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에서 가장 위험한 4등급 물질에 해당한다. ‘매우 짧은 신체적 노출로도 사망 혹은 심각한 부상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4등급이다. 양근서 경기도의원(민주통합당·안산6)이 경기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화성사업장은 연간 불산 7658t, 불산함유물 7719t, 불산과 질산 혼합물 866t을 사용한다. 모두 반도체 제조용이다. 화성사업장 인근 주민들은 불산이 공장 담벼락을 넘지는 않았을지 불안해했고, 불산 유출 소식이 하루가 지나도록 담벼락조차 넘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2월13일 화성사업장을 찾았다. 경부고속도로 기흥·동탄 톨게이트를 채 빠져나오기 전부터 거대한 구조물이 시야를 가린다. ‘SAMSUNG ELECTRONICS’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이다. 도로 안내판이 직진은 삼성전자 후문, 우회전은 삼성전자 중문이라고 가리킨다. 도로를 따라가보니 ‘망포동~영통~흥덕지구’ 사이를 운행하는 삼성전자 셔틀버스가 보인다. 도로명이 ‘삼성전자로’다. 화성사업장이 동탄새도시를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화성사업장 공장 위로 흰 연기가 쉴 새 없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사람들 놀라지 말라는 듯 건물에는 커다랗게 ‘수증기 발생지역’이라고 써놓았다. 화성사업장과 동탄새도시는 왕복 6~8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다. 공장과 주거단지가 이리 붙어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석우초등학교, 예당초등학교, 능동중·고등학교가 지척이다.
도시와 기업, 기업과 지역은 어떤 관계여야 할까. 구애하는 쪽은 주로 도시다. 지역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지방자치단체는 투자 유치에 공을 들인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지난해 7월31일 경기도와 삼성전자는 평택 고덕산업단지 분양계약 및 지원협약을 체결했다. 경기도가 2조4천억원을 들여 395만㎡ 부지에 삼성전자 전용 산업단지를 조성해 제공하면, 삼성전자는 이곳에 100조원 이상을 투자해 5개 라인 규모의 차세대 반도체 생산공장을 세운다는 계획이다. 화성사업장 불산 유출 사고가 발생하기 열흘 전인 지난 1월17일에는 삼성전자 입주에 맞추려고 고덕산업단지 교통개선대책사업을 3년 앞당기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기도 했다. 같은 날 경기도의회 의원 16명은 감사원에 ‘삼성로 확장 공사’ 감사를 청구하는 의안을 발의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주변 폭 20m 도로를 35m로 확장하며 경기도가 430억원을 부담하게 됐는데, 법령 위반과 특혜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기업하기 좋은 도시 만들기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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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권리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 불신이
기업이 혜택만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투자를 통한 고용과 도시 기반시설 확충, 세수 증대 등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를 창출한다. 경기도는 고덕산업단지에 삼성전자를 유치하며 3만여 명의 고용 창출 효과와 연간 1천억원 이상의 지방세 수익을 예상했다. 요즘에는 지역사회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역시 강조된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더해 ‘기업에 대한 지역사회의 알 권리’ 충족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2월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주최한 삼성전자 불산 유출 사고 긴급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집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어떤 유해물질을 취급하고, 그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사고가 발생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이 제대로 전달돼야 한다. 그런 정보를 요구할 때만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각종 규제와 감독 기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미 불산 누출 사고 당시에도 공장 근처 주민들은 해당 공장이 불산을 취급하는지, 불산이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인근에 7년째 살고 있다는 한 주민(43)은 “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지 집 근처 기업을 심각한 위험으로 체감하지 못했다. 안전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불산 유출 이튿날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과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가 화성사업장 근처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했다. “삼성인데 어련히 잘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너무나 원시적이다. 아무것도 안 돼 있는 것 아니냐.” 불산 유출 사고가 발생한 화성사업장 바로 옆에 사는 또 다른 주민(52)은 “무섭다”고 했다. ‘수증기’라고 강조하는 흰 연기도 이제는 수증기로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불산이 이번만 누출된 것은 아니지 않겠나. 삼성이 저런데 다른 하청업체나 공장들은 제대로 관리가 될지 의문이다.” 알 권리가 충족되지 않는 곳에는 불신이 쌓인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지역 경제에 끼치는 파급효과는 막대하다. 주민들에게는 초일류 기업이 지역에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거기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을 것이다. 삼성은 국민 대표기업으로서 윤리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양근서 경기도의원) (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인 조형제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일반적으로 삼성의 기업문화 자체가 폐쇄적이고 정보 공유를 하지 않으려 한다. 이번 불산 유출 사건에서 보듯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경우 지역사회가 안게 되는 파급효과가 크다. 기업 스스로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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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장 밖으로 불산 빼낸 것 들통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50마일 되는 곳에 샌타클라라 카운티가 있다. 과수원이 많은 탓에 과일통조림 제조업이 흥했다. 1970년대 들어 이 지역에 실리콘을 소재로 하는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샌타클라라 카운티는 이후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청정산업’으로 알려진 반도체 제조에는 1천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1981년 실리콘밸리 반도체 공장의 지하 저장탱크에서 유출된 유독 화학물질이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지역 주민과 반도체 업체 노동자, 환경 전문가들이 참여한 ‘실리콘밸리 독성물질방지연합’(SVTC)이 만들어진다. 이들이 특히 강조한 것은 기업들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지역사회의 알 권리’였다. 1983년 이 단체는 지방자치 조례인 ‘지역사회의 알 권리에 대한 법’과 ‘유해물질 모델 조례’를 통과시켰다. SVTC가 만든 ‘전자산업의 사회적·환경적 책임에 대한 실리콘 원칙’에는 ‘철저한 감시와 참여를 보장하도록 지역사회나 노동자들과 긴밀히 협조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은수미 의원실(민주당)의 조라정 비서관은 실리콘밸리의 사례를 들며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유해 화학물질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화성사업장에서는 2010년에도 불산 유출 사고가 있었지만 삼성전자는 ‘자체적으로’ 덮어버린 전력이 있다. 2월15일 삼성전자의 ‘거짓말’이 또다시 들통 났다. 경찰 수사 결과, 화성사업장에서 유출된 불산을 대형 송풍기를 통해 공장 밖으로 빼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경찰은 이런 사실을 유출 당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분석해 밝혀냈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유출된 불산은 자동으로 폐수처리장으로 이송된다. 밀폐 공간인 클린룸 밖으로 불산이 유출된 적은 없다”고 거듭 주장해왔다.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서도 삼성전자는 “외부 누출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지만, CCTV 영상 공개는 거부해 비난을 샀다. 공개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불산 유출 뒤 화성환경운동연합에는 “사건 발생 이튿날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2시간 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다”는 주민들의 제보가 들어왔다. 주민들은 더 이상 삼성전자를 믿지 못한다.
비밀이 화를 부른 경우는 많다. 조형제 교수는 “산업안전 문제를 개별 사업장을 넘어서는, 지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업안전 시스템을 개별 기업 안에만 구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지역사회 구성원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산 유출 처리 과정에서 은폐 의혹만 키운 삼성전자, 늑장보고·허위보고를 받고도 삼성전자를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경기도 모두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다. 조형제 교수는 영업비밀과 관련해서도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당연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 공개 여부를 무조건 기업의 판단에만 맡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전면 공개가 기업에 부담이 된다면 공개 수준을 등급화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민감한 내용은 관련 기관이나 전문가들에게 공개하되, 조금 덜 민감한 부분은 시민단체나 일반 시민들에게 접근권을 폭넓게 열어주자는 것이다.
도시개발 전모 공개한수원 화성은 1794년 성을 쌓기 시작해 1796년 완공됐다. 성곽·행궁에 더해 주거지와 만석거(저수지) 같은 농업 기반시설까지 갖춘 자족도시를 꿈꿨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는 고덕산업단지를 조성하게 될 경기도시공사는 에서 수원 화성을 이렇게 평했다. “농업 수확으로 성을 유지·관리하도록 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서울의 상공업 및 주민을 수원으로 이전 촉진하기 위한 10년 면세 등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그 당시 도시개발 전략으로는 가히 감탄할 만하다.” 요즘 말로 하면 ‘기업도시’쯤이 될 듯하다. 화성 완공 직후 10권으로 된 가 만들어졌다. 공사의 시작과 끝을 ‘모두 공개’했다. 왕의 명령, 어전회의 기록, 노임 규정, 시설물별 자재 수량, 성에 들어간 돌덩어리와 목재의 수량, 단순노무자들의 명단과 임금까지 낱낱이 적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지역주민과의 ‘무해한’ 화학적 결합이다. 새 산업단지에 ‘지역사회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어떨까. 도시개발 전략으로 가히 감탄할 만하지 않은가.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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