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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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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또는 불법 복제물

등록 2013-03-08 22:01 수정 2020-05-03 04:27

1971년 7월4일, 미국 일리노이대학 학생인 마이클 하트(24)가 학교 연구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는 학교 전산망에 접속해 ‘미국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타자로 쳐서 올리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 도서관 작업인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ww.gutenberg.org)의 시작이다. 지금은 재단까지 세워진 이 사업은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문학작품 등을 디지털화해 공유하는 일을 한다. 이 작업으로 지금까지 1만6천 개가 넘는 전자책이 만들어졌다.
 
일본서 ‘지스이’라 불리며 먼저 유행
그러나 스캐너 같은 전자장비가 흔해지자 전자책을 만드는 데 굳이 ‘구텐베르크’라는 심오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게 됐다. ‘북스캔’(Book Scan)이라고 부르는 스캐너로 책을 직접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선 2010년 이후부터 스캔 업무만 전문적으로 맡아 처리해주는 이른바 ‘북스캔 업체’도 등장했다. 이 업체들은 개인이 의뢰한 종이책을 받아 분리·재단한 뒤 해당 내용을 스캔해 EPUB(국제디지털출판포럼이 정한 전자책 포맷)나 PDF 파일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진작가 박성훈(36)씨는 8년 전부터 북스캔을 활용해 책을 보관한다. 최근에는 태블릿PC 안에 사진 공부에 필요한 책을 넣어두고 있다. 매번 꺼내봐야 하는 두꺼운 사진 이론서 등을 파일 하나에 담아 들고 다닌다. “지금까지 약 40권을 직접 스캔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하지만 종이책이 주는 맛이 있어서 사진 이론서 말고는 여전히 종이책으로 봅니다.” 그래도 등 사진 관련 고전 이론서들이 그의 책장에서 태블릿PC로 옮겨진 지 오래다.
연구원인 김성훈(34)씨는 최근 북스캔을 이용해 책장 두 개를 싹 비웠다. 그는 “거의 다 읽었지만 버리거나 팔기는 애매한 책들이 이사 다닐 때마다 자꾸 늘어 고민이었다”며 “석 달 전쯤 시험 삼아 북스캔 업체를 이용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 책 50권을 몽땅 파일로 만든 뒤 책들은 버렸다”고 했다. 그가 만든 전자책은 소설과 인문과학서, 실용서 등 다양하다.
북스캔의 등장은 태블릿PC와 스마트폰 보급이 늘어나며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한 사업을 한국 업체가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는 “혼자 밥을 지어 먹듯이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북스캔 사업을 ‘지스이’라고 부른다. 책 한 권을 100엔(약 1400원)씩 받고 전자책으로 만들어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경쟁이 치열해져 1천원 수준으로 북스캔을 해주는 업체가 많다.
 
“스캔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판매돼”

최근 몇 년 사이 늘어난 북스캔 업체에 맡겨 책장의 책을 정리하거나 두꺼운 학술서적 등을 전자책으로 만들어 들고 다니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북스캔의 저작권 침해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겨레 박미향

최근 몇 년 사이 늘어난 북스캔 업체에 맡겨 책장의 책을 정리하거나 두꺼운 학술서적 등을 전자책으로 만들어 들고 다니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북스캔의 저작권 침해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겨레 박미향

출판업계에서는 북스캔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출판사에서 펴내는 전자책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전자책에서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한 독자가 종이책을 직접 전자책으로 만드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북스캔이 먼저 발달한 일본이 우리나라처럼 전자책 시장이 더디게 형성되는 곳이라는 점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스캔 업체인 ‘아이북스캔’의 송기현 고객팀장은 “요즘에는 온라인 서점에서 산 책을 업체 주소로 바로 배송한 뒤 스캔을 의뢰하는 고객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별로 싸지 않고, 종이책 수준의 심미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번거로운 북스캔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펴낸 ‘세계 전자책 시장의 현황 조사와 이슈 분석’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전자책 평균 가격은 종이책의 70~80% 수준이지만, 미국은 전자책이 종이책의 절반 가격을 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북스캔 대행업은 등장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저작권 침해 논란을 겪고 있다. 현행법의 테두리에서는 북스캔을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현행 저작권법에서는 공표된 저작물을 개인적 용도 등 비영리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복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복사기기”에서는 복제를 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즉 집에서 내 장비로 북스캔을 하면 괜찮지만, 업체가 대신 해주면 저작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전국의 대학 교내·외 복사업소 1239곳을 조사했는데, 대학가의 불법 복제가 줄어든 원인으로 북스캔 등 새로운 형태의 불법 복제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북스캔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법안도 발의됐다. 이낙연 민주통합당 의원 등 여야 의원 12명이 지난 1월28일 발의한 저작권법 개정안에는 스캐너·사진기를 현행법상 복사기기의 범위에 구체적으로 포함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의원은 “(북스캔을 통해) 스캔한 파일이 공유 사이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실정”이라며 “저작권을 침해하고 창작 의지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므로 금지되는 복제의 범위에 스캐너·사진기 등을 이용한 복제도 포함되도록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해 논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한다”고 발의 배경을 밝혔다.

 

업계 “저작권 침해 막기 위해 자정 노력”

그러나 북스캔 업체들은 전자책 마지막장에 이름·아이디 등 소유자의 정보를 표기하고, 스캔한 파일을 파기하는 등 저작권 침해를 막기 위한 자정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이 개인 소장을 위해 전자책을 만드는 것인데, 업체가 대신 해주면 불법이고 본인이 직접 고가의 기기를 구입해 북스캔을 하는 건 합법이라고 정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 북스캔 사업이 불법이라고 통보해온 적은 아직 없다”며 “북스캔 업체가 많다는 건 그만큼 시장 수요가 있다는 뜻이므로 법적 문제를 보완해서 전자책을 활성화하는 쪽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게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저작권 방지 조처 없이 업계만의 자율 경비에 맡기기에는 위험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전자책의 과도기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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