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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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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수’들을 위하여

등록 2007-10-26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며칠 전 대기업에 다니는 한 부장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근황을 물었더니, 4개월째 ‘기러기 아빠’ 신세랍니다. 40대 중반의 그는 아내와 중2짜리 딸, 5살 난 아들을 동남아의 한 나라로 보내고 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큰애가 대학에 갈 나이까지, 그러니까 5년은 기러기 아빠로 지내기로 작심했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5년이 가능하겠냐는 걱정에, 그는 “혼자 사는 것도 해보니 익숙해지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곤 웃었지만 그의 가슴속에 자리한 헛헛함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봉이 상당하다고 쳐도 이국 땅의 가족을 부양하자면 분명 등허리가 휠 겁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외롭겠지요. 영화 에서 끓인 라면을 먹으며 조기유학을 간 어린 아들, 그리고 아내와 국제통화를 하는 중고차 매매업소 사장 혁수(김상호 분)처럼.
왜 그렇게 아이들에게 올인하느냐고 홧김에 쏘아붙였지만, 그건 마음에 없는 말이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 이 땅의 아빠들은 다들 크고 작은 ‘혁수’일 테니까요. 오늘도 밤늦게 학원을 마친 아이를 데리러 차를 몰고 가는 이도 그럴 테고, 학원에 다니고 싶은 아이의 바람을 채워주지 못해 몰래 한숨짓거나 쓴 술잔을 들이켜는 이도 그럴 테지요. 모두 자신의 오늘보다 아이들의 희뿌연 앞날이 걱정입니다. 대학을 가는 것도 아등바등 힘든 전쟁인데, 취업이라는 장벽은 더 크고 높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은 안정된 정규직을 잡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만큼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10대, 20대를 부르는 용어로 ‘88만원 세대’가 맞춤하게 자리잡았을까요?(우리나라 전체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의 임금 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이 나오는 데서 생긴 말입니다.)
이번 대선은 교육이든 일자리든 다음 세대의 미래를 놓고 사회 구성원들이 치열하게 다투는 장이 됐으면 합니다. 마침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대학입시의 3단계 자율화와 특목고·자립형 사립고·특별기숙학교 300개 설립 등을 뼈대로 한 교육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정책이 입시지옥을 부채질하고 교육 양극화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염려와는 별개로,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 다행스럽습니다. 공허하지 않고 내실 있는 논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조금 애매해 보입니다. 2008년 정부, 학부모, 교사, 전문가, 시민사회, 정당 사이에 교육혁명을 위한 사회적 대협약을 맺겠다고 밝혔으나 실체가 제대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명박 후보에 대해 “입시지옥 부활로 엄청난 혼란과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증가를 불러올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럼 대안이 뭔데’라는 반박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젠 손에 잡히는 대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필요합니다. 이미 충분할 만큼 ‘지옥’을 경험했고, 많은 ‘혁수’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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