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과연 같을까 다를까, 만약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까, 하는 문제는 오랜 세월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다. 빨간색을 보고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과연 똑같을까. 만약 다르다면 ‘객관적 실재’라는 게 있는 것일까. 빨간색과 초록색이 무색과 황색으로 보이는 적록색맹인 사람도 훈련을 받으면 신호등의 적신호를 구별할 수 있다는데, 나와 그 사람에게 빨간색은 같은 것일까. 만일 모든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영화 에 빗대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짜일까.
병적으로 기억을 잃는 여자
똑같은 문제는 범죄를 둘러싸고도 일어날 수 있다. 가해자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범죄를 이유로 처벌을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아닐까. 자백을 받기 가장 어려운 피의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어떤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아무리 불리한 증거가 많이 쌓여 있어도 애초에 죄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극히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잊어버릴 수 없는 사실- 예를 들어 사람을 살해한 사실- 전체를 망각하는 일은 생각하기 힘들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는 관련된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싸우는 일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는 범죄로 인한 수익의 배분과 관련된 기억이다. 훔친 물건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몰래 빼돌린 회사 돈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갔는지를 두고 수사기관에서 공범들끼리 다투는 것을 보면 단순히 그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때가 많다. 서로 자기가 기억하는 게 확실하다고 믿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이럴 때 처벌의 근거는 증거에 따라 인정되는 사실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당사자의 기억이 되어야 할까.
S. J. 왓슨의 는 사고(혹은 범죄)로 인해 병적으로 기억을 잃는 사람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크리스틴 루카스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지난 십수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현재 47살인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29살 때로 돌아간다. 옆에 누워 있는 나이 든 남자를 보고 나이트클럽이나 바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20대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볼살과 턱밑살이 늘어진 중년의 얼굴이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에게 깜짝 놀란 목소리로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 누구예요?”라고 묻자, 그는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남편이야. 결혼한 지 여러 해 됐어.” 그제야 크리스틴은 자신의 손가락에도 반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울에는 그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다. ‘벤, 당신 남편’이라는 메모와 함께.
그 남자, 벤은 크리스틴을 옆에 앉히고 천천히 설명을 해준다. 그녀가 18년 전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 그 이후 24시간 동안의 일만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 벤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내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지만 그날 밤이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 크리스틴은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객관적 진실’은 존재할까
그런데 남편이 출근한 뒤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그녀에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닥터 내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크리스틴이 지난 몇 달간 남편 모르게 자신을 찾아와 상담을 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권유에 따라 매일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잠을 자고 나면 상담을 받고 일기를 쓴 사실은 물론 닥터 내시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는 크리스틴에게 옷장에 일기장을 감춰두라고 지시하고는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일기장을 찾아 읽어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옷장을 열어본 크리스틴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첫 페이지에는 파란색 잉크로 세 단어가 대문자로 적혀 있다. ‘벤을 믿지 마라.’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쓴 일기를 읽으며 머릿속에서 한번 사라졌던 기억을 다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롭게 겪은 일을 적어나간다. 얼마 뒤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녀가 일기에 적은 내용과 남편이 설명해주는 사실이 달랐던 것이다. 어느 한쪽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세 종류의 ‘과거’가 존재한다. 그녀가 물어서 일기에 적은 과거- 닥터 내시뿐만 아니라 어렵게 찾아낸 옛 친구도 크리스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준다-, 남편이 매일매일 들려주는 과거, 이미 잊어버렸지만 간헐적으로 환각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의 과거. 어느 것이 진짜일까. 그리고 그녀가 실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만일 닥터 내시의 전화를 못 받았다면, 그래서 남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과거만이 존재했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알 수 없었을 ‘다른 과거’는 마치 평행우주에서 일어난 일처럼 차원이 다른 세계가 아닐까.
여러 겹으로 얽힌 기억 속에서 그녀는 괴로워한다. 때로는 남편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때로는 자신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인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떤다. 그녀는 과연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왜 남편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까. 아니, 남편의 말이 거짓말일까. 그가 들려주는 말이야말로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까.
때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적극적인 허위의 기억이 진실을 확정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패트릭 콕번과 헨리 콕번이 쓴 실화 (Henry’s Demon)은 정신분열증 환자인 아들과 저널리스트 아버지가 자신들의 경험을 적은 책이다. 병에 걸린 아들은 나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집을 나가 강에 뛰어드는 등 환각 때문에 생명을 잃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긴다. 이때 아버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아들이 때때로 환각을 본다는 사실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나중까지도 아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 환각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는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실제의 차이
크리스틴은 결국 어느 정도 기억을 되살리고 실제 있었던 사고(혹은 범죄)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 책의 끝부분에 실린 반전을 읽고 나면 독자는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세 가지 버전의 ‘과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은 다른 이야기가 또 있는 게 아닐까. 만일 우리가 남편이 크리스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만 읽을 수 있었다면 그것을 진실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또 다른 버전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실제로 존재하는’ 크리스틴의 과거와 ‘우리가 아는’ 그녀의 과거는 과연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어떤 것이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진실’을 근거로 그녀나 그녀의 남편을 단죄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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