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빚 때문에 미국인들이 유럽으로 도망치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바이스>(Vice)라는 언론에 등록금을 내려고 막대한 빚을 진 미국인들이 채권 추심을 피해 유럽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연이 소개됐다. 졸업 뒤 사회 초년 시절 월급을 고스란히 은행에 넘겨주느니 고국을 떠나기로 한 미국인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유럽에서 미국에 견줄 만한 ‘등록금 지옥’으로는 영국이 꼽힌다. 2021년 영국인 대학생 한 명이 영국 대학에 낸 등록금은 한 해 1만1500유로, 우리 돈 1600만원 정도다. 영국 대학은 외국 학생에게는 3~5배 더 비싼 등록금을 받는다. 취업이 잘되는 사립대학일수록 학자금 부담이 크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 출신 학생이 이런 대학에 갔을 때 겪는 곤란은 크다. 영국 대학 졸업생은 평균 우리 돈 6천만원가량의 빚을 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통계도 있다. 급기야는 2021년 한 영국 학자금 대출 포털에서 영국 대학생 4%가 성노동을 하며 학비를 낸다는 조사를 발표하며 논란이 커졌다. 영국 킹스턴대학은 영국에서 대학생 성노동자가 7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슈피겔> <슈테른> 등 독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일부 대학은 성노동자를 위한 매뉴얼을 발간해 교육한다. 독일 민영방송 <에르테엘>(RTL)은 온라인 기사에서 “과도한 등록금이 학생들을 성노동으로 몰고 있다”며 “상황이 이러한데도 등록금을 낮추기는커녕 성노동 교육을 하다니 대학이 포주냐”고 비판했다.
영국에서 ‘학생 빈곤’의 모든 이유가 등록금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국에선 보통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가계 독립을 하기 때문에 물가가 비싼 영국에서 학생들의 생활비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가장 사회적 불평등 지수가 높은 영국 사회에서 비싼 등록금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한다는 점은 무수히 지적돼왔다. 등록금에 군불을 때는 것은 소수만을 위한 엘리트 교육이다. 역대 영국 총리 56명 중 42명이 옥스퍼드대학이나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오는 등 소수 대학이 권력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배출하고 있다. 또 영국에는 2900곳 넘는 공립고등학교가 있지만 그 소수 대학의 신입생 절반 이상을 8개 사립고등학교 출신으로 채우면서 교육 불평등은 일찌감치 굳어졌다.
국내총생산(GDP)의 6.6%를 교육에 쓰는 노르웨이나 스웨덴(5.5%), 덴마크(5.2%)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공공이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해서 무상 대학교육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영국과는 다른 길을 갔다. 프랑스와 그리스는 헌법에 “고등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대학이 등록금을 받을 길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에서는 무상 학자금을 위해 시민과 학생들이 끊임없이 싸워왔다. 1971년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평등권을 대학 교육에 대한 평등한 접근 권리로 해석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등록금이 폐지됐다. 이 판결은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모토 속에 대학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시대의 성과이기도 했다. 이 시기 대학의 한 주체로 성장한 학생회와 교직원 노조는 그 뒤 등록금 부활이 시도될 때마다 이를 막아서는 역할을 해왔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헤센·바덴뷔르템베르크 등의 주에서 법을 고쳐 등록금을 받으려 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빌레펠트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총장 자동차를 불태우기도 했다. 북유럽의 무상 대학이 사회복지행정의 결과라면 독일의 등록금 없는 대학은 학생들이 싸워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학생회가 등록금 인상을 이토록 격렬히 반대해온 이유는 등록금이 사회 불평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일학생회는 3년마다 신입생 배경을 조사하는데 보통 부모가 대학을 나온 가정의 아이들은 70~80%가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가 대학을 가본 적이 없는 노동계급 출신 아이들은 20%가량만 대졸자가 된다. 등록금을 부과했을 때 이 차이는 더욱 커지리라는 우려다.
미하엘 하르트만 다름슈타트공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독일 정치교육센터에 기고한 글에서 대학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적자금을 줄이고 대학 등록금을 올린 사회는 결국 소수 상류층에 일류 대학을 내주고 대다수 노동자의 아이들은 낮은 순위권 대학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반복해왔다고 비판한다.
최근 유럽에선 대학 교육에서 배제되는 노동자의 아이들이 외국인으로 대체되고 있다. 2021년 프랑스에서는 외국 유학생에게 대학 등록금을 받는 것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영국처럼 비싼 등록금을 받고 유학생을 유치할 수 있게 됐다. 스웨덴에서도 2011년부터 유학생에게는 등록금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는 2017년부터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유럽연합 출신이 아닌 학생에게 등록금을 징수하면서 대규모 시위와 소송이 잇따랐는데, 2022년 11월11일 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독일에서도 보수당과 독일을위한대안이라는 극우당 등은 외국인에게 등록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세력의 집권에 따라 등록금 인상과 확대를 실현해온 영국의 사례가 다른 유럽국가의 미래가 될까? 역설적이게도 최근 영국에서는 엘리트 대학 절반 이상이 다른 나라에서 온 유색인종 학생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영국의 보수세력은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를 앞세워 노동자의 표심까지 잡았지만 그 사회의 불평등이 커질수록 다른 나라의 상위계층 아이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베를린(독일)=남은주 <한겨레21>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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