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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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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하’ 깃발만 펄럭인다

베이징 겨울올림픽, 전쟁 치르듯 ‘더 격하게’ 중국식 애국주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다
등록 2022-02-14 16:23 수정 2022-02-15 10:43
2022년 2월4일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선 위구르족 출신 스키 크로스컨트리 선수 디니거얼 이라무장과 스키 노르딕 복합 선수 자오자원이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2월4일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선 위구르족 출신 스키 크로스컨트리 선수 디니거얼 이라무장과 스키 노르딕 복합 선수 자오자원이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지금 중국에선 두 개의 ‘영화’가 박스오피스를 석권하고 있다. 하나는 전쟁을 다뤘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평화와 ‘함께하는 미래’를 주제로 다뤘다. 설이 시작되자마자 전국 동시상영으로 개봉된 두 영화를 모두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영화 모두 ‘실망’이다. 한 영화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지만 초반부터 흥미를 잃었다. 다들 눈치챘겠지만 이 중 한 영화는 2022년 2월4일 개막한 베이징 겨울올림픽이다.

한국전쟁 ‘비극’이 애국주의 ‘홍보’ 영화로

2월1일 설날, 영화 <장진호의 수문교>(長津湖之水門橋)가 중국 전역에서 일제히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21년 추석 전후로 개봉해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 <장진호>의 속편이다. 중국에서 ‘항미원조’ 전쟁이라 부르는,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다.

한국전쟁을 다루지만 영화에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인민지원군(중국에선 한국전쟁에 참가한 자국 군인을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항미원조 중국인민지원군’이라고 한다)이다. 세계 최강의 무기와 전투력을 가진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용감한 전투력과 불굴의 애국정신에 겁먹고 쫓기다시피 후퇴하는 오합지졸의 조연들로 출연한다. ‘장진호’ 시리즈는 내용이나 기술 등 여러 면에서 속편이 전작보다 훨씬 더 ‘상업적으로’ 세련되고 잘 만들어진 영화다. 물론 중국에서 체제와 이데올로기, 애국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만드는 ‘주선율’(主旋律·현실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과거 주선율 영화 대부분은 촌스럽고 저급한 영화기법으로 만들어져서 기관과 당조직을 동원해 강제 관람을 시키거나 학생 대상의 애국주의 교육 자료로 활용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주선율 영화들은 ‘장진호’ 시리즈를 만든 천카이거, 쉬커 등 국제적 명망을 지닌 ‘거장급’ 감독들과 일류 스태프, 최고의 제작사가 참여해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상업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전랑>과 <홍해행동> 등 박스오피스 사상 ‘역대급’을 몇 번 갈아치운 주선율 영화도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주선율 영화의 주류는 ‘항미원조’ 전쟁, 즉 한국전쟁이다. 중국은 ‘제국주의 패권국가’ 미국에 맞서 자국의 후세대에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정의로운 전쟁’을 상상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하필이면 그 상상의 무대가 우리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이다. 이웃 나라의 비극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영화에선 오직 ‘남의 땅’에서 자신들의 ‘정의로운 전쟁’ 임무를 수행하며 죽어가는 ‘항미원조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의 영웅적인 애국심만을 기릴 뿐이다.

“양놈들이 우리를 무시하면, 존엄은 전쟁에서 (이겨서) 얻을 수밖에 없다.” 2021년 추석에 개봉한 전작 <장진호>에서 마오쩌둥이 한국전쟁 총사령관을 맡은 펑더화이와 전쟁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마오에게 한국전쟁에 참가하는 이유는 ‘중국을 무시하는 양놈들에게서 존엄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2022년 설에 개봉한 속편 <장진호의 수문교>에 나오는 주인공은 부대원들에게 “중국인은 건드리기 힘든 민족이라는 걸 (미국에)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국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귀화해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에일린 구(중국명 구아이링) 선수가 2022년 2월8일 스키 프리스타일 여자 빅에어 결선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을 깨물어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미국 국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귀화해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에일린 구(중국명 구아이링) 선수가 2022년 2월8일 스키 프리스타일 여자 빅에어 결선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을 깨물어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1952년 전쟁 중 치른 포로수용소 올림픽

1937년 영국인으로 스페인 내전에 자원해서 참가했던 조지 오웰은 당시의 경험담을 쓴 책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표현을 빌리면, 전쟁에 참가한 당시의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왜 참전했느냐고 묻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영화에서처럼 ‘중국인의 존엄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인 인민지원군 전사들이 그들의 신성한 전쟁 임무를 수행하러 가면서 외치는 구호는 인류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중국 만세! 신중국 만세!’였다.

중국이 한국전쟁 참가를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하며 선전하는 또 한 가지 영화 같은 이야기에는 ‘벽동 올림픽’이 있다. 정확한 명칭은 ‘중국인민지원군 벽동 전쟁포로 수용소 올림픽’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면서 평안북도 벽동군에 거대한 포로수용소를 지어 연합군 전쟁포로를 관리했다.

‘벽동 전쟁포로 수용소 올림픽’은 1952년 11월15일부터 26일까지, 각 포로수용소에서 선발된 14개국 출신 포로 선수 500여 명이 참가했다. 농구, 배구, 축구, 권투, 달리기 등 27개 종목으로 구성됐고 성화 봉송 등 모든 형식과 절차를 실제 올림픽처럼 진행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포로수용소 경기장 입구에는 ‘평화의 길’이라는 글자를 쓴 현판까지 내걸었다. 당시 ‘벽동 올림픽’을 지켜봤던 중국인민지원군 노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3천m 달리기에서 모든 우승을 휩쓴 선수는 한국인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이걸 본 중국인민지원군들은 ‘전장에서 한국군들이 너무 빨리 달려서 잡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았다’며 감탄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영광과 존엄에 동원된 선수들

중국은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열리기 아주 오래전부터 ‘벽동 올림픽’을 세계 최초로 중국이 치른 ‘평화 올림픽’이라고 선전했다. 중국이 당시 포로들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해줬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증거가 바로 ‘벽동 올림픽’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소문에 따르면, ‘벽동 올림픽’도 ‘장진호’ 시리즈처럼 국제적인 거물급 감독이 참여해서 또 다른 애국주의 주선율 영화로 제작되고 있단다. 이 영화가 나오면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과 2022년 겨울올림픽을 개최하기 50년도 훨씬 더 전에 이미 올림픽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평화’를 실천한 ‘인권국’이었음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된다.

왜 그때 세계 최초로 포로수용소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 총알이 빗발치고 서로가 죽고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국적을 초월한 올림픽을 조직했다는 건 어쨌거나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포로들의 인권과 인간적인 대우가 보장됐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 전쟁이 없었다면 평화로운 세계와 인간적인 삶이 파괴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한 편의 흥행 대작은 2022년 2월4일 개막한 베이징 겨울올림픽이다. 14년 전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열린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이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알리는 ‘전작’이었다면,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은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패권국이 됐음을 선포하는 ‘속편’ 격이다.

이번에도 ‘전작을 뛰어넘는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깨고 전작을 능가하는 중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고 있다. 하지만 흥행은 다른 애국주의 주선율 영화들처럼 대부분 중국 내에서만 일어나고 있다. 베이징 겨울올림픽은 2021년 도쿄 여름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가 여전히 계속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더 강력한 ‘중국식 봉쇄와 격리’로 치러지고 있다. 더군다나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탄압 등에 항의하는 의미로 서방의 주요 국가와 그 동맹국들이 외교적 보이콧을 하면서 더 꽁꽁 얼어붙은 올림픽이 됐다.

애초 흥행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이를 더 악물고 전쟁에 임하듯 겨울올림픽을 치르고 있다. <장진호의 수문교>에서 인민지원군 중대장 우첸리가 “쉬운 전쟁은 없다. 싸우기 어려운 전쟁일수록 더 격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중국은 ‘더 격하게’ 올림픽이라는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외교적 보이콧을 한 국가들을 향해서도 보란 듯이,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처럼 개막식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위구르족 출신의 스키 크로스컨트리 선수인 디니거얼 이라무장을 선택했다. 겨울올림픽이라는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중국인들의 ‘영광과 존엄을 위해’ 미리 선택된 주인공 격 최고 영웅들은 하버드대학 출신의 미국인 아버지와 베이징대학과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구아이링(미국명 에일린 구)과 쇼트트랙 출전 선수들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의 수문교> 포스터. 웨이보 갈무리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의 수문교> 포스터. 웨이보 갈무리

미국에서 귀화한 인민지원군 영웅

원래 미국 국적자이자 프리스타일 스키 분야에서 세계 최강자인 구아이링은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중국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 미-중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영어와 중국어로 말하는 데 막힘이 없고 외모도 모델급인데다, 수준급 피아노 실력에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합격한 지성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인의 ‘체면’을 완벽하게 세워줄 인물이다. ‘엄마의 나라’ 중국에 사는 소녀들에게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중국 국적을 달고 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자청했으니, 이보다 더 넝쿨째 굴러 들어온 박이 있을까. 그는 프리스타일 스키 분야에서 ‘중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땄고, 지금 중국의 온·오프라인과 미디어 광고에서 구아이링의 얼굴과 이름이 도배돼 있다.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덩달아 영웅이 됐다. 새로운 ‘인민지원군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한 피에르 쿠베르탱은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일이다”라고 말했지만, 지금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상영되는 극장 안에서는 ‘오로지 승리하고 정복하라. 중국 만세!’라는 구호만이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니까, 두 영화는 처음부터 ‘다른’ 영화가 아니라 ‘같은’ 영화였던 셈이다. 둘 다 똑같은 애국주의 주선율 상업영화였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박현숙의 북경만보: 북경만보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박현숙씨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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