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밥과 반찬을 우물거리던 딸아이가 갑자기 ‘폭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엄마! 조국이 뭐야? 조국을 생각하면 무슨 감정이 생겨? 내 조국은 어디야?” 10월9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신해혁명 110주년 기념 연설을 하는 뉴스를 보던 중이었다. 시 주석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애국주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을 가리켜 “무릇 조상을 잊고, 조국을 배반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는 자들은 지금까지 그 결말이 좋았던 적이 없고…”라고 아주 무섭고 차가운 눈빛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뭐가 웃긴지 혼자 낄낄거리며 “나는 조국이 뭔지 잘 몰라서 배반할 조국도 없다”고 또 우물거리며 밥알을 씹었다.
올해 16살, 고등학교 1학년인 딸은 엄마의 조국인 한국 서울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뒤, 100일이 채 안 돼 아빠의 조국인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줄곧 16년의 삶을 중국에서 살았다. 중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고 자국민과 결혼한 외국인에게도 국적을 부여하지 않기에 나와 딸의 조국은 한국이고, 중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남편의 조국은 중국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로는 ‘다문화가정’이다. 집에서도 나와 아이들은 한국말로 소통하고, 아빠와는 중국어로 소통한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자주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특히 딸은 ‘조국에 대한’ 강한 집착과 그리움을 표현하곤 한다. 매년 방학 때 며칠 잠깐씩 여행처럼 다녀온 것 외에 온전하게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여권에 적힌 조국’을 오매불망 늘 가슴에 품고 그리워한다. 딸아이의 꿈은 나중에 커서 꼭 ‘조국에서 1년 이상 살아보는 것’이다. 더 큰 꿈은 ‘조국을 지키는 경찰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원래 중국어를 모국어로 구사했지만, 요즘은 ‘내 조국은 한국’이라며 밤낮없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을 보면서 ‘네이티브 스피커’ 훈련을 하고 있다. 그래도 딸에게 조국이란 개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철학적 개념인 듯하다. 갑자기 ‘조국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걸 보니 말이다.
‘네이티브’ 미국인이자 인종과 다민족, 다문화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로널드 다카키는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어느 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버지니아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탔다. 백인 남성인 택시기사와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기사가 다카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근데 당신은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나요?” 그전에도 여러 차례 들은 말이지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카키는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을 여기서 살았고,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답니다”라고 대답하자, 기사는 “어쩐지 영어를 너무 잘한다 싶었지요!”라며 백미러로 한번 힐끗 자신을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기사에게 다카키는 미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카키는 그 순간 택시 밖의 버지니아 풍경을 보면서 애초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출발했던 ‘다문화적인 미국’ 역사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고 한다. 1607년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처음 미국에 정착하고, 이후 아프리카 노예 20명이 미국 땅에 발을 내디디면서 ‘다인종·다문화적인 아메리카’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기 때문이다.
다카키는 자신을 동료 미국 시민으로 보지 않은 건 그 택시기사의 잘못이 아니라, 미국은 유럽 이민자들이 만들었고 미국 역사는 백인들의 역사라고 가르쳐온, 백인 중심의 ‘거대서사’ 필터로 미국 역사를 보게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백인 외의 다른 인종들과 유럽인을 조상으로 두지 않은 사람들은 이 거대서사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시당하거나 ‘우리와는 다르거나 열등한 타자’로 취급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교수가 된 그 역시 백인 미국인들 눈에는 그저 타자로 보일 뿐이다.
다카키는 미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건 유럽인을 조상으로 둔 백인 미국인뿐만 아니라 이민자인 자신의 부모님과 어릴 때 같이 살았던 이웃집의 수많은 다양한 인종이 만들어낸 ‘다문화’였고, 이 때문에 미국 역사는 백인 중심의 거대서사가 아니라 다문화·다민족이라는 ‘또 다른 거울’로 들여다봐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다문화 가정사’ 이야기를 들려 준다.
“나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인 이민자고 어머니는 사탕수수밭 농장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우리는 일본인, 중국인, 포르투갈인, 한국인 그리고 하와이 원주민이 뒤섞여 있는 노동자계급 이웃들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다문화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당시 우리는 다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5살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중국인 요리사와 재혼했다. (…) 내 가족은 나중에 일본인과 베트남인, 영국인, 중국인, 대만인, 유대인 그리고 멕시코 혈통 등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혼합된 다문화가정으로 확대됐다.”(로널드 다카키, <또 다른 거울>(A Different Mirror))
미국이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가 뒤섞여 만들어진 ‘합중국’이라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다. 중국 지도자들은 입버릇처럼 중국은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다민족·다문화 공동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절대다수의 주류는 한족이고 나머지는 소수민족으로 분류돼 미국의 비백인처럼 거대서사 주변으로 밀려나 타자화되거나 박제화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사는 위구르족은 다른 민족보다 더 주변화하거나 타자화되는 소수민족이다. 주류 민족인 한족이 보기에 그들은 여러 정치경제적 이유로 ‘조국을 배반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려는’ 위험요인을 가진 민족이다. 이들은 신분증에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라고 표기됐음에도 늘 어디 가나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되고 내륙 주요 도시로의 이동과 국외 여행도 제한받는다.
위구르족은 한때 수도 베이징의 개방성과 다문화를 상징하며 ‘가장 잘나가는’ 소수민족이었다. 베이징에서 그들이 모여 살았던 간자커우 일대 ‘신장촌’과 중앙민족대학이 있는 ‘웨이궁춘’(魏公村)은 한때 베이징의 다문화를 상징하던 공간이었다. 웨이궁춘과 웨이궁제(魏公街)라는 지명은 ‘위구르족’을 뜻하는 ‘웨이우얼’(畏兀儿)에서 유래됐다. 웨이궁춘의 전성기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여진족의 금나라를 물리치고 1271년 원나라를 세운 뒤, 베이징을 가장 큰 중심 수도인 ‘대도’(大都)로 정하면서다. 지금의 투루판 일대에서 당시 고창국(高昌國)이라는 나라를 세워 살던 웨이우얼인은 몽골 서역 정복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들은 원나라 황제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독차지하는 ‘고급 귀족’ 계층이 됐다.
원 세조 쿠빌라이 황제가 가장 신임한 신하였던 멍쑤쓰도 서역에서 건너온 웨이우얼 출신으로, 그가 죽자 황제는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지금의 웨이궁춘에 있는 가오량허 옆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뒤 베이징에 살던 웨이우얼인들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가오량허 근처에 매장됐고 그 일대를 중심으로 서역에서 건너온 웨이우얼인들이 집단촌락을 이루며 모여 살게 됐다. 웨이궁춘을 연구한 학자 저우훙에 따르면, 웨이궁춘이라는 지명은 멍쑤쓰의 사위이자 역시 원나라 고관을 지냈던 웨이우얼 출신 롄시셴과 그 아버지의 공로를 기려 위공국(魏公國)에 봉해진 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당시 웨이우얼인은 지금처럼 이슬람 신자가 아니라 불교를 믿었고, 그들을 통해 원나라 수도 베이징에는 수많은 불교 사찰이 세워졌다. 지금 웨이궁춘 부근에 있는 베이징의 유서 깊은 사찰인 만수사와 오탑사는 당시 웨이우얼인의 ‘문화적 영향’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 덕에 웨이궁춘 일대는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됐고, 온갖 서역 문화와 물품이 베이징에 들어오는 통로였다. 원나라 이후 웨이궁춘은 지금의 싼리툰보다 더 국제화되고 다양한 문화가 평화롭게 교류되는 공간이었다.
웨이궁춘은 청나라 말기에 쇠퇴하기 시작해 사회주의 신중국 건국 뒤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1980년대 이후 이곳에 중앙민족대학이 생기면서 부활했다. 위구르인이 다시 들어와서 식당을 차리고 집단거주지를 만들자, 이곳에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들어와서 베이징의 다문화 거리로 거듭났다. 하지만 1990년대 말까지도 북적거리던 웨이궁춘에 지금 남은 건 식당 몇 군데와 ‘지명’밖에 없다. 갖가지 정치적 이유로 이들은 고향인 신장으로 다시 돌려보내지거나 베이징의 회족 거리인 뉴제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베이징을 다양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거울’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들여다봐야 할나에게도 다카키처럼 ‘확대된’ 다문화가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지금은 ‘내 조국은 어디이며, 조국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딸과 아들이 자라서 만일 다른 소수민족이나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우리 가족은 한족과 위구르족,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서양인 등 다양한 민족과 조국을 가진 확대된 다문화가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딸과 손자들은 여전히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을까. 다카키가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소수자들’(Minorities)이 된다고.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또 다른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우리에게도 머지않은 미래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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