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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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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허송세월하는 겨울, 원명원에 가서 논다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으로 약탈당한 황실정원… 중국인들의 ‘통곡의 벽’
등록 2021-01-01 11:01 수정 2021-01-01 11:01
중국 베이징의 원명원은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가 통치하던 때 만들어진 황실정원 궁전이다.

중국 베이징의 원명원은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가 통치하던 때 만들어진 황실정원 궁전이다.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그 갇힌 성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김훈, <남한산성> 작가의 말 중)

코로나19로 허송세월하는 나는 겨울이 돌아오자 베이징 원명원에 가서 자주 논다. 원명원 안에는 ‘푸하이’와 ‘첸하이’라 부르는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고, 이곳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주로 서식한다는 흑조 가족이 산다. 2008년 2월23일 우연히 원명원으로 날아온 흑조 한 쌍이 호숫가에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해, 새끼들을 낳아 거대한 일가족을 이뤘다.

사람들은 1년 내내 흑조 가족을 보기 위해 원명원을 찾는다. 특히 여름이면 만개한 연꽃이 호수를 뒤덮어서 거대한 연꽃궁전으로 변해 온종일 놀다 간다. 김훈이 봄이면 자주 가서 논다는 남한산성은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고 한다.

내가 자주 가서 놀곤 하는 원명원에는 호숫가 주변으로 목을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참았던 긴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환청이 자글거린다. 햇살 아래서 곤한 낮잠을 자던 어린 흑조는 호수 위로 파동이 일어나는 울음소리에 놀란 듯 접었던 까만 날개를 펴고 슬픔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두리번한다.

울음소리는 첸하이와 푸하이 주변을 둘러싼 담장 위로 길게 뻗어나가고, 황제와 황후들이 노래를 듣고 뱃놀이를 구경하던 펑라이야오타이(푸하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옴)의 폐허 위에도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에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모여서 울고 간다는 ‘통곡의 벽’이 있다면, 원명원은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들의 ‘통곡의 벽’이다.

야만인 손에 불타버린 아름다운 정원

“함풍제가 직면한 위기는 실로 엄중한 것이었다. 그는 연안 지역으로 침투하는 서양 세력의 위협에 맞서야 했고, 서남 지역을 중심으로 청왕조의 체제 전복을 꾀하는 태평천국운동 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원명원에 기거하던 그는 한밤중까지 고단한 국사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천단에 가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 전야에 꺼억꺼억 긴 통곡을 했다.”(왕룽쭈, <잃어버린 낙원, 원명원> 중)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는 짧은 재위(1850~1861년) 기간에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락과 몰락을 앞당겼다. 1856년 중국 광둥에서 일어난 ‘애로호 사건’(중국 관리들이 영국 선적 애로호에서 밀수범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배에 들어가 관련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하고 배에 달린 영국 국기를 끌어내린 사건. 이 사건은 서양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사사건건 트집 잡고 빌미를 만들어 중국에서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권을 극대화하려 했다.

당시 함풍제가 통치하던 청나라 황실은 18세기 이후 중상주의를 강화하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가던 서구 열강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이 여전히 ‘천조상국’(중국이 유일한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이라 여기며, 이미 총포 등 선진 무기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자국 식민지로 만들어가던 서구 열강의 공격적인 ‘세계관’을 읽지 못하고 곳곳에서 그들과 불필요한 마찰과 충돌을 일으켰다.

6대 황제 건륭제(1711~1799년) 때부터 파국을 막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중국 안에 갇혀 중국 밖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실정원인 원명원을 만들고, 그 안에 살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보지 못했다. 함풍제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원명원 내 아방궁에서 밤새도록 통곡했지만, 원명원이 ‘야만인들’ 손에 불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원명원은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가 통치하던 시절 만들어진 황실정원 궁전이다. 그 뒤 옹정제와 건륭제, 함풍제 등을 거치며 대대적인 투자와 확장을 해서 ‘만국의 정원’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동서양의 조경이 조합된, 완벽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원명원에 관한 소문은 멀리 유럽까지 퍼져나가서 서양인들은 ‘동방의 베르사유궁전’이라 이름 붙이며 그 아름다운 정원궁전을 보고 싶어 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베이징 중심에 있는 자금성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원명원에서 보냈다. 황후와 후궁들의 거처도 대부분 원명원으로 옮겼고,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면 원명원 밖에 나가지 않았다.

원명원은 실질적으로 자금성을 대신하는 중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겹겹으로 에워싼 높은 성벽이 있고 구중궁궐에서 펼쳐지는 온갖 음모와 술수, 간신들이 판치는 자금성에서는 하루도 편히 숨을 쉴 수 없었던 황제들은 원명원의 탁 트인 하늘과 넓은 호수, 우거진 산림 속에 노래와 시를 짓고 뱃놀이하며 인생의 평범한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원명원을 처음 만들었던 강희제 이후 모든 황제의 소망은 원명원에서 태어나 살다가 원명원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1860년 영프 연합군이 원명원을 강탈하고 불태웠을 때, 이는 중국을 지탱하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무너지는 일이었고, 황제들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뜻했다.

영프 연합군이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금성이 아닌 원명원을 점령해서 불태우는 것이, 중국 황제들의 심장에 직접적으로 칼을 꽂아 ‘항복’을 이끌어내는 일임을 알았다. 원명원이 불타고 있을 때, 멀리 열하(지금의 허베이성 청더)로 도망가 있던 함풍제는 그 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뒤 쓸쓸하게 죽었다. 함풍제를 비롯해 그전의 황제들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세계를 관찰하는 ‘눈’을 가졌더라면 원명원은 불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매카트니의 무릎을 꿇렸지만…

1792년 영국 황실은 건륭제의 83살 생일 축하연을 빌미로 외교관인 조지 매카트니를 중국에 파견한다. 실질적인 목적은 청나라와의 무역관계를 확대하기 위해서다. 동남아 곳곳에 이미 여러 동인도회사를 세워서 상업적인 이익 확장을 모색하던 영국은 아시아의 최대 강국인 중국에서 미래의 이익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과 관료들은 매카트니 일행을 단순히 진귀한 선물을 들고 온 외국 축하 사절단으로만 여기고 ‘예를 갖춰’ 접대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영국 사절단 매카트니와 대면한 건륭제가 처음 부딪힌 ‘문화적 충돌’은 황제를 알현하는 ‘법도’에 관한 것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려면 먼저 땅바닥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절해야 하는 게 중국의 법도였지만, 영국인 매카트니에게는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중국과의 통상무역 확대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매카트니는 굴욕을 참고 건륭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 매카트니는 연안 지역에서의 통상 확대를 요구했지만, 건륭제는 일언지하에 요구를 거절했다. ‘천조상국’인 중국은 영국과 무역해야 할 만큼 부족한 물자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에게 한번 문을 열어주면 그때는 머리를 조아리기는커녕 자신들의 법도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국 사절단이 건륭제 83살 생일에 들고 온 선물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무기였던 야전포였다. …건륭제는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 등 유럽인이 중국에 나타난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건륭제뿐만 아니라 주변 관료 중 누구도 영국인이 진상 선물로 가지고 와서 원명원 안에서 일부러 공개 전시를 한 총포 등 선진 무기의 잠재적 위협을 인식하지 못했다.”(왕룽쭈, <잃어버린 낙원, 원명원> 중)

매카트니 일행이 아무런 수확 없이 베이징을 떠난 뒤,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들’은 여전히 원명원 안에 고이 보관됐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그것은 곧바로 중국을 겨누는 진짜 무기로 변했다. 그 무기를 이용해 원명원을 불사르고 보물을 강탈했다. 원명원이 불타던 날, 치솟는 불길과 연기를 보며 베이징 안에 있던 수많은 민중과 선비들은 함풍제가 울던 날 밤처럼, 밤새도록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 조각상이 있는 이유

2019년 4월15일, 프랑스의 ‘역사’이자 파리의 상징인 노트르담성당이 불에 탔다. 프랑스인들은 불타는 성당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밤새도록 파리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약 160년 전 원명원이 불타던 날과 기묘하게도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그날 전세계인들은 프랑스와 파리에 슬픔을 표하고 아픔을 공감한다고 했지만, 수많은 중국인은 쾌재를 불렀다. “쌤통이다. 인과응보다. 다 불태워버려라!” 인터넷에선 수많은 익명의 누리꾼이 약 160년 전 원명원을 불사르고 보물을 강탈해간 프랑스의 만행을 지적하며 노트르담성당의 화재를 ‘고소해’했다.

원명원 내 파괴된 서양루 입구에는 다소 생뚱맞은 빅토르 위고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위고는 한 번도 원명원에 와본 적이 없다. 그의 동상이 그곳에 세워진 이유는, 영프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살랐다는 소식을 듣고 위고가 했다는 통렬한 비판 때문이다. 위고는 영프 연합군을 ‘두 도적’으로 비유하며 “두 도적 떼가 저지른 야만적인 짓”이라고 통탄했다.

중국인들은 위고의 이 말을 몹시 사랑한다. 그래서 2010년 서양루 앞에 위고의 얼굴 조각상을 세웠다. 국가를 초월한 위고의 위대한 ‘인류애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노트르담성당 화재를 보며 지난날 원명원이 불타던 모습을 겹쳐서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복잡한 심정은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중국에 부족한 것이 ‘빅토르 위고’로 대표되는 포용과 관용, 인류애 정신이다. 불타는 노트르담성당 앞에서 통곡하는 프랑스인들을 향해 “역사의 인과응보”라고 조롱한다면, 중국이 티베트와 신장웨이우얼 지역에서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는 수많은 문화학살과 인권탄압은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18세기 이후 변화하는 세계질서를 전혀 감을 잡지 못하던 청나라 황제들처럼, 지금도 세계인들이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모르는 건 여전히 중국과 중국인들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 밖 세계를 읽지 못했던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 앞에서 그저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서양 열강의 선진 무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중국과 중국인들은 여전히 중국 밖 세계를 읽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민심이 지금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중국은 지난 100여 년간의 치욕을 잊지 않고 부단히 노력해서 ‘중국몽’을 이루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세계를 천조상국 관점으로 읽고 있다. 천조상국의 관례와 법도를 내세우며 매카트니를 무릎 꿇린 건륭제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올겨울 날마다 허송세월하며 원명원에서 놀며 나는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시절이 지나간 뒤 중국은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하는.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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