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유령이 떠돌고 있다. 전쟁범죄라는 유령이….”
5월14일 오후 2시께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 10층 배움터. 30명 남짓한 청중 앞에 푸른 눈의 노학자가 강연에 나섰다. 정치학자임에도 국제 인권법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쌓아온 마이클 하스(71) 미 하와이대 명예교수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저서 33권에는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권’이란 낱말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이날 강연 주제인 ‘오바마 행정부의 딜레마: 부시 행정부의 269가지 전쟁범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지난해 12월 하스 교수가 내놓은 책 를 바탕에 두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선언에서 제네바협정, 유엔헌장에서 ‘무력 충돌에 어린이를 참여시키는 것에 대한 어린이 권리협정 추가 의정서’까지. 하스 교수는 전쟁범죄를 규정하고 그 단죄를 위해 인류가 합의해놓은 49가지 국제법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강연의 문을 열었다. 그는 1시간 30가량 이어진 열띤 강연을 미 대법관 출신으로 나치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수석검사를 맡았던 로버트 잭슨의 말로 마감했다. “전쟁범죄를 처단하지 않으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강연을 마친 하스 교수와 11층 소위원회실로 자리를 옮겨 1시간 남짓 마주 앉았다.
-부시 행정부의 전쟁범죄를 269가지로 꼽았는데.=거기(269)까지만 세고 그만뒀다. (웃음) 애초엔 268가지였다. 책을 거의 마무리했을 무렵 워싱턴의 의회를 방문하게 됐는데, 마침 하원에서 흥미로운 청문회를 하고 있더라. 1991년 제1차 걸프전 당시 사담 후세인 정권에 사로잡혀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다가 풀려난 미국인들의 보상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군이 저지른 포로 학대와 고문에 대한 보상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막판에 이를 추가해 269가지를 지적하게 됐다.
-부시 행정부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크게 불법 전쟁, 교전 와중에 저지른 과오, 포로 학대, 점령 뒤 민사작전 중의 과오 등 네 분야로 나눠볼 수 있다. 유엔헌장은 침략전쟁 자체를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침략전쟁을 하겠다는 위협이나 이를 준비하는 행위, 침략전쟁 계획을 모의하는 것, 그리고 침략전쟁을 선동하는 것도 모두 전쟁범죄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미 정보당국조차 인정한 바다. 그럼에도 부시 전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선동했다.
전쟁 중엔 제네바협정을 철저히 무시했다. 민간인에게도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고, 사설 경비업체 직원을 전투에 가담시키는 등 용병을 활용했다. 이는 국제법이 엄격히 금하고 있는 바다. 아부그라이브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국제법은 고문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까지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은 임기 중에도, 임기가 끝나고도 고문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난 4월 미 중앙정보국(CIA)의 고문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뒤 미국에선 이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데.=사실 고문 논쟁은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계속돼왔다. 극도로 의견이 엇갈리다 보니 논쟁이 소모적이고 당파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부시 행정부가 사용한 고문 기법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어디까지 견뎌내는지, 어느 정도나 고문을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한계선까지 밀고 나갔다. 이는 국제법이 엄중히 금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실험’에 해당한다.
-고문 관련 문서를 공개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5월13일엔 관련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생각이 바뀐 건가.=글쎄…, 사진을 공개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봤을 게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던가. 하지만 (막상 공개가 되면) 무슬림 지역에선 온통 난리가 날 게 뻔하다. 반미시위가 줄을 잇겠지. 오바마 행정부로선 피하고 싶은 상황일 터다. 주변에서 그렇게 조언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발 물러선 게 아닌가 싶다. 이미 아는 내용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고문과 전쟁범죄에 대한 새로운 혐의 내용을 찾아내 공개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아부그라이브나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 대해선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막연히 전쟁범죄라고 말할 게 아니라, 어떤 이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야 여론이 움직인다.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4월 말로 출범 100일을 넘겼다. 지금까지 성적을 매긴다면.=아직은 말을 아낄 시점이라고 본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진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고 할까? 젊은 대통령이고, 주변에 인맥도 많지 않다. 경제위기 속에 출범했으니,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할 게다. 의료보험 문제도 미국 내에선 큰 사안이다.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와이에서 오래 살다 보면 그걸 깨닫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도 어린 시절을 하와이에서 보냈으니 잘 알 게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도 아프간에선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키스탄에서 무인 항공기를 동원한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커지고 있는데.=오바마 대통령도 아직까지 아프간에서 제네바협정을 준수하라고 군에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간·파키스탄과 관련해 정책이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정립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사실 군 수뇌부에 문제가 많다. 누가 백린탄이나 열화우라늄탄 같은 국제법이 금한 무기를 사용하라고 명령하는가? 대통령이 아니라 군 수뇌부다.
-군 수뇌부가 오바마 대통령과 맞서고 있다는 얘기인가.=대통령이 월스트리트와 군부에 둘러싸인 형국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직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제네바협정을 철저히 지키라고 명했다. 그리고 현장 확인을 지시했다. 현장을 둘러보고 온 군에선 ‘다 잘 돌아간다. 다만 독방 수용자들이 운동을 할 때 대화를 허락하는 정도의 조처가 더해져야 할 듯싶다’라고 보고했단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독방에 감금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데…. 최근 아프간 주둔 사령관을 전격 교체한 것이 이런 상황을 고쳐나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제네바협정을 준수하라고 지시했다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공약은 수용소 폐쇄였다.=수용소 폐쇄 반대 논리로 자주 등장하는 게 석방해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진 수감자들을 받아줄 나라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귀국하면 자기 나라 정부에 체포돼 정치적 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법적으로 이들은 ‘난민’으로 규정돼야 마땅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나서 이들을 스위스 등 중립국으로 옮겨 제3국에 재정착할 때까지 보호해야 한다. 이런 제안을 난민기구 쪽에 여러 차례 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전쟁범죄는 이미 저질러졌다. 단죄가 가능할까.=세 가지 정도 의견이 있다. 첫째, 새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굳이 과거를 들춰내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둘째, 철저히 기소·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낱낱이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의견을 지지한다. 지금으로선 침공과 고문의 불법성 여부만 가지고도 의견이 엇갈리고 합의가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전쟁범죄를 뿌리 뽑으려면 먼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여론이 모인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수단 다르푸르 학살과 관련해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을 기소했다. 국제법 전문가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한데.=어차피 임기 중인 대통령을 재판소로 끌어오지도 못할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법적이라기보다 정치적 행동으로 보인다. 전례를 만들어가야 할 신생 기관으로서 너무 앞서나간 감이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미덕은 있다. 현직(바시르 대통령)도 기소했는데, 왜 전직(부시 전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가능해졌다. (웃음)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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