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은 10월2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이승엽에게는 10년 만의 한국시리즈 타석이었다. 그는 2002년 한국시리즈 최종 6차전 9회말 LG 이상훈을 상대해 동점 3점 홈런을 날렸다. 이 홈런은 이어진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과 함께 프로야구 사상 가장 인상적인 한국시리즈 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성은 이듬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이승엽은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컵스에서 뛴 것으로 만족한다”
10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서도 멋들어진 홈런 두 방을 칠 수 있는 스타 이승엽을 둔 야구팬은 행복하다. 그만큼이나 이승엽도 복귀 첫해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을 수 있게 한 동료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실력을 갖췄음에도 ‘가을야구’의 참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스타는 많다.
이승엽에게 홈런을 내준 SK 포수 조인성에게도 10월24일 경기는 ‘10년 만의 한국시리즈’였다. 정확히는 ‘10년 만의 포스트시즌’이다. 그는 이승엽과 달리 내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하지만 전 소속팀 LG는 2003년 이후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조인성은 올해 강팀 SK로 이적해서야 포스트시즌 경기에 다시 뛸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이후 입단한 수많은 LG 선수들에게 포스트시즌은 아직 미답의 땅이다.
‘8888577’은 야구팬 사이에서 유명한 숫자다. 2001~2007년 롯데 자이언츠의 순위가 저랬다. 롯데는 2008년 이후 올해까지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며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당시의 구단 분위기는 암울했다. ‘8888577’ 시절 고참 투수이던 염종석(현 코치)은 한 후배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형, 3만 관중 앞에서 포스트시즌 경기를 치른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어니 뱅크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유격수’를 뽑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1953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한 그는 통산 19시즌 2528경기를 뛰며 홈런 512개를 기록했다. 야구에서 유격수는 공격보다는 수비력이 우선하는 포지션이다. 강타자 유격수를 보유한 팀은 그만큼 비교 우위를 누린다. 뱅크스는 유격수로 264홈런을 쳤고, 그 뒤 1루수로 전향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전 최고의 ‘파워히터 유격수’는 뱅크스였다.
하지만 뱅크스는 19년 동안 한 번도 포스트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뱅크스는 통산 50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 24명 가운데 유일하게 포스트시즌에 뛰지 못한 선수다. 또한 포스트시즌 출전 기록 없이 가장 많은 정규시즌 경기를 뛴 선수이기도 하다. 그가 뛴 19년 동안 소속팀 컵스는 5할 미만 승률 13회를 기록한 만년 하위 팀이었다. 컵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출전은 1908년의 일이다. 당시는 포스트시즌 출전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오늘날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은 디비전시리즈, 리그챔피언결정전을 거쳐 월드시리즈로 이어지는 3단계 스케줄이다. 하지만 1968년까지 포스트시즌 경기는 오직 월드시리즈 하나뿐이었다.
올해 81살인 그는 지금도 “컵스 말고 다른 팀에서 뛰었다면 포스트시즌에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뱅크스는 이렇게 답했다. “컵스 유니폼을 입고 미국의 중심인 시카고에서 선수 생활을 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가 데뷔한 1953년은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인종 장벽을 깨고 데뷔한 5년 뒤였다. 흑인 선수 뱅크스가 뛰기에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동료들조차 흑인 선수와는 악수를 거부했고, 홈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당시에 대해 뱅크스는 “흑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야구장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어떤 인종이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스터 컵스’로 불린 그는 누구보다도 연고지 팬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인물이다. 팬의 사인 요청을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컵스 팬 사이에선 ‘뱅크스가 식사 중일 때는 사인 요청을 하지 말자’는 규칙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 자체가 기적이었던 사나이
어린 시절 뱅크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현재를 감사하게 여긴다면 언젠가 기적이 일어날 거야”라는 가르침을 줬다. 끝내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기적’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뱅크스는 메이저리그 선수로 뛴다는 사실 자체를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챔피언이 되고 싶어 하며, 챔피언이 가려지는 ‘가을야구’에 참가하길 원한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이든 정규시즌 경기든 야구는 같은 야구다. ‘비운의 선수’ 어니 뱅크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야구하기 좋은 날이군. 한 경기 더 하지”(Let’s play two)이다. 진정으로 야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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