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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북한이 당한 국호 차별 역사

등록 2012-08-02 13:28 수정 2020-05-03 04:26

7월26일(한국시각)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햄든파크에서 열린 여자축구 조별리그 G조 1차전 북한-콜롬비아전. 전광판 북한 선수 소개 화면에서 엉뚱하게 태극기가 나왔다. 북한 선수단은 강력히 항의하며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경기는 1시간5분간 지연된 끝에 가까스레 열렸다.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격앙했고,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너무나 불행한 사태”라며 유감을 표해야 했다. 주최국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까지 나서서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북한이기에 이 문제는 더 심각했을 수 있다. 북한 올림픽사는 국가 상징을 둘러싼 악연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투쟁으로 얻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국호
북한의 올림픽 ‘공식 데뷔’는 1972년 뮌헨올림픽이다. 8년 빠를 수도 있었다. 북한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 13개 종목에 144명의 대형 선수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선수도 출전을 하지 못했다. 개막 직전 선수단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국호’였다. IOC는 북한의 대회 공식 국호로 ‘노스코리아’(North Korea)를 지정했다. 반면 한국은 ‘코리아’(Korea)였다. 북한 측은 ‘노스코리아’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IOC는 “올림픽 국호는 정치적 명칭이 아니라 지리적 구역을 뜻할 뿐”이라며 북한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북한 선수단은 첫 올림픽 출전 대신 보이콧을 택했다.
국호만이 보이콧의 이유는 아니었다. 도쿄올림픽 1년 전인 1963년 10월 인도네시아에선 제1회 신생국대회(GANEFO)가 열렸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주창했고 제3세계의 맹주를 자처한 중국이 뒤를 받친 대회였다. IOC는 이 대회를 ‘올림픽 운동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대응했다. 신생국대회 출전 선수에게 올림픽 참가 불허 조처를 내렸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북한 선수 가운데는 여자육상 400m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신금단도 있었다. 북한은 IOC에 블랙리스트 해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금단은 귀국 직전 한국전쟁 중 헤어진 아버지 신문준씨와 눈물의 상봉을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당시 올림픽은 남북한 체제 대결의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언론은 금메달 후보 신금단의 출전 불허가 올림픽 보이콧의 결정적 이유라고 판단했다. 북한뿐 아니라 신생국대회 주최국 인도네시아도 출전 금지 조처에 항의하며 대회를 보이콧했다. 북한의 참가가 성사됐더라면 남북 대결은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컸다. 당시 북한 스포츠의 수준은 한국보다 앞서 있었다.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은 전 출전국을 통틀어 5번째로 많은 선수 224명을 파견하고도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도쿄 쇼크’는 이듬해 태릉선수촌 개소와 본격적인 엘리트 스포츠 육성 정책으로 이어졌다.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 북한의 국호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당시 북한 외에 대만과 동독도 국호 문제로 IOC와 갈등을 빚었다. IOC는 1968년 2월 총회에서 한국 대표 장기영이 제출한 ‘한국은 코리아, 북한은 노스코리아’ 안을 찬성 31표, 반대 21표, 기권 2표로 통과시켰다. 대회 직전에 IOC는 특별 성명을 내고 “동독과 대만은 멕시코시티 대회부터 희망 국호를 사용하되, 북한은 1972년 뮌헨올림픽부터 DPRK 국호를 사용한다”는 타협안을 냈다. 그러나 당시 쿠바에 머무르던 북한 선수단은 이에 반발하고 짐을 꾸려 평양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1969년 IOC 총회에서 DPRK 국호를 승인받음으로써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에 정식 데뷔한다. 1964년 인스브루크 겨울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지만 당시 겨울올림픽은 여름올림픽의 부속 경기로 간주됐다. 이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국전쟁 종전 뒤 16년밖에 되지 않은 해였다. 당시 은 ‘모순을 드러낸 IOC 총회’라는 제목의 기사로 북한의 IOC 가입을 비판했다.

경제적 변화가 낳은 올림픽 역전
북한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사격 소구경 복사의 이준호가 금메달을 따내는 등 총 메달 5개를 획득했다. 한국은 은메달 하나에 그쳤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한국이 금1·은1·동4로 금1·은1의 북한을 앞섰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에선 한국이, 1984·1988년 대회는 북한이 불참해 남북 대결이 이뤄지지 못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부터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올림픽 강국 대열에 올랐지만 북한은 최근 세 차례 여름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땄을 뿐이다. 경제학자들은 올림픽 메달의 가장 큰 변수로 인구, 1인당 국내총생산(GDP), 정부 정책을 꼽는다. 남북의 올림픽 메달 역전은 1970년대 이후 두 나라가 겪은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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