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스포츠과학의 발달과 함께 체계적인 영양 관리가 더 나은 경기력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축구 선수들이 아무거나 먹고 뛰던 시절이 있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영국 프로축구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스포츠영양학이 비교적 일찍 발전한 영국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영국 선수들은 기름이 줄줄 흐르는 짠 생선튀김과 닭날개를 맥주와 함께 마시고 경기를 뛰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자들의 경고에도 선수와 지도자들은 ‘우리 영국인은 이렇게 먹어야 힘이 난다’며 변화를 거부했다.
찐 생선과 채소 위주, 커피 설탕량도 체크1990년대 후반 아르센 벵거라는 프랑스 출신 지도자의 등장은 영국 축구 문화의 큰 흐름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스포츠영양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벵거는 아스널 구단에 부임하자마자 선수들의 맥주잔을 빼앗고 식단의 대부분을 찐 생선과 삶은 채소로 바꿔버렸다. 연어와 대구는 천천히 쪄서 먹고, 닭고기는 튀기는 대신 무조건 그릴에 구웠다. 적색 육류가 사라졌고 유제품도 금지됐다. 삶은 채소는 소금과 당분이 제거된 밍밍한 소스를 뿌려 먹었다. 벵거 감독은 선수들이 커피를 마실 때 넣는 설탕량까지 체크했고, 매일같이 소변 검사를 한 뒤 차트를 만들어 선수들의 수분 섭취량을 확인했다.
일부에서는 벵거의 집착과도 같은 세심함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의 시도가 실제적인 결과로 드러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후반 아스널 선수들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달라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놀라워했다. 토니 애덤스, 리 딕슨, 나이젤 윈터번 등 노장들은 벵거의 부임 이후 선수 생활이 몇 년은 더 연장됐다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변혁의 결과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에 고집이 센 영국 감독들도 결국 벵거를 인정하고 그의 방식을 따르게 됐다. 이제 영국은 3·4부 리그에서도 토스트에 잼을 잔뜩 바른 뒤 베이컨, 튀긴 소시지 등과 함께 먹는 전통 식습관을 찾아볼 수 없다.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수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인 폴 파커(46)는 “아르센 벵거는 잉글랜드 축구를 어둠의 시대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끈 선구자”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박지성이 활약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모든 음식에 마요네즈를 사용하지 않으며 소량의 버터와 올리브유로만 조리한다. 육류는 지방을 완전히 제거하고, 닭고기는 껍질을 벗긴 걸 사용한다. 또한 염분이 많이 포함된 토마토케첩, 타바스코 소스 등 자극적인 소스는 엄격하게 제한한다.
하프타임에 먹는 간식에는 약간의 자유가 주어지나, 바나나가 보편적인 메뉴로 알려졌다. 다량의 철분을 함유한 바나나는 쉽게 분해돼 영양분이 몸에 흡수되는 시간이 빠르고, 순간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를 재빨리 공급해 근육이 뭉치는 걸 예방하는 데도 큰 효과가 있다. 젤리와 초콜릿 등 곧바로 에너지화하는 음식도 선호되지만 최근의 대세는 바나나로 알려졌다.
필자는 몇 해 전 몇몇 프로축구단에서 선수 식단을 관찰한 일이 있었다. 일반 사업장의 급식에 비해 재료와 음식의 가짓수에서 고급 식단임이 분명해 보였으나 딱히 계산된 건강식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리가 평소 먹는 짜고 매운 식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프로축구단의 한 끼 식사 단가는 7천~9천원으로 일반 회사의 급식 단가인 2500~3천원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식단 구성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장아찌와 게장 등의 반찬이 눈에 띄었고, 육류도 딱히 지방을 제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선수들 역시 현미가 들어간 잡곡밥보다는 흰쌀밥을 원했고, 찌개류를 선호했다. 육류에서도 지방이 많은 삼겹살과 갈비, 차돌박이, 새우튀김, 탕수육 등을 좋아했고 스포츠영양 학자가 추천하는 흰살생선과 연어 등은 냉대를 받았다.
김치찌개를 금지시킨 히딩크 감독대표팀으로 올라가면 한 끼 식비가 2만5천원으로 상승해 최고급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 역시 선수들의 입맛·기호와 적절히 타협한 식단이지 영국이나 서유럽 프로축구계가 강조하는 절제된 식사는 아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먹은 식단에는 꽃게탕, 순대국밥, 청국장, 김치찌개, 양고기 전골, 돼지갈비에 창난 젓갈과 떡볶이도 포함돼 있었다고 하니, 아르센 벵거나 히딩크 감독이 있었으면 기겁했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지도하던 시절 김치찌개, 고추장, 튀김 등을 금지한 일이 있었다. 보쌈도 지방 함유량 때문에 처음에는 극구 반대했으나 이후 선수단과 타협(?)해 허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부분의 서양 음식에 비하면 한식은 건강식이다. 염분 논란이 있지만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먹어도 괜찮을 법하다. 영국 축구의 식단을 바꿔놓은 벵거 감독 역시 일본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포츠영양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맵고 짠 음식이 주를 이루는 현대 한식이 축구 선수의 경기력에 주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진행된 바가 없다. 물론 소금과 설탕을 극도로 제한한 채 생선을 중심으로 쪄서 조리하는 벵거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시행된 ‘벵거 음식 개혁’으로 인해 영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평균 선수 생활 기간은 연장됐고 체력 또한 훨씬 강화됐다. 자국 문화와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영국 프로축구계가 낯선 프랑스인의 변혁을 받아들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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