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굼브레히트의 은, 스포츠를 ‘읽기’ 위한 사람들이 그나마 밑줄 그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다. 흔한 표현대로 ‘세기의 명저’라거나 ‘독보적 저작’이라는 뜻이 아니라, 국내에 허약한 출판 풍토 때문에 스포츠를 깊이 조망한 책이 희귀한데 그나마 인간의 이 ‘기이한’ 활동(스포츠가 순수하다고?)을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단, 이 책의 문장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와 칸트의 ‘숭고’ 혹은 하위징아의 ‘호모루덴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돼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독자를 대상으로, 드리블하듯이 ‘자유롭게’ 쓴 일종의 ‘시론’이어서, 밑줄을 그을 만한 ‘그럴듯한’ 문장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것을 손쉽게 지적 나침반으로 차용해서는 곤란하다.
비속을 초월한 영원성을 지닌 ‘한순간’예컨대, 굼브레히트는 인류학자 로제 카유아가 운동선수는 ‘신성한 존재’의 차원에 속한다는 관점을 펼쳐 ‘비평적인 찬사’를 받았다고 언급하면서 카유아는 스포츠를 종교 의례처럼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벌어지는 ‘신성한 차원’의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럴듯한, 매우 그럴듯한, 이 ‘신성한’ 표현은 우리가 사랑하고 몰입하는 스포츠를 불멸의 성으로 인도한다. 이런 ‘신성한’ 표현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바라보았던 지난밤의 비루한 한숨을 갑자기 드높은 차원으로 ‘고양’하려는 초월자의 고결한 욕망인 것처럼, 쓱쓱 비벼준다.
그런데 카유아는, 적어도 그런 ‘신성한 차원’이 개념 상태에서는 존재하지만, 실제의 상황, 그러니까 현대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카유아의 ‘놀이와 성스러움’에 따르면, 현대는 “성스럽지 않은 세계, 축제도 놀이도 없는 세계, 따라서 일정한 기준도 없고 헌신해야 할 원리도 없으며 창조적 파격도 없는 세계”다. 숭고한 그 무엇! 이 비속한 일상을 초월하는 영원성! 한순간이나마 우리를 현실의 우리가 아니게끔 만드는 강렬한 감정의 충일한 상태!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스포츠의 ‘한순간’이고 그런 순간이 미디어를 통해 무한 복제돼 우리 시야에 포착되는 순간, 우리의 심폐근육은 틀림없이 팽팽하게 압축되지만, 글쎄, 잠시 한숨 돌리고 보면, 스포츠의 그 같은 충일감은 미분양 아파트의 썰렁한 모델하우스 위에 매달린, 모든 욕망의 ‘거품’을 조롱하듯이 내려다보는 애드벌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카유아는 성스러움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직접적인 이익, 냉소주의, 모든 규범의 부정”이 확연해지고 이것이 “고귀한 활동 및 명예로운 경쟁의 전제가 되는 규칙을 대신”하게 된다고 썼다. 서구에 전승하는 놀이문화가 특정한 시기에 과연 ‘신성’한 것이었는지 나는 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지만(역사가 진공 밀폐용기 ‘락앤락’은 아닐 텐데), 어쨌거나 그런 때가 있었다 해도, 현대에 이르러 그 신성성은 갈수록 거세된다는 카유아의 한숨을 나는 지지한다.
코너링보다 더 복잡한 쇼트트랙 진실게임특히 ‘경기장 바깥의 규칙’이 경기장의 기반을 흔들어버리는 일이,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한국의 스포츠 현실을 보라. 말 그대로 스포츠계의 폭력·위계·기만·성폭행·협잡·이간질 따위는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없던 일이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랠프 앨리슨의 ‘인비저블’) 곳에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보이게 된 것뿐이다. 몇 년 전 유소년 축구 경기를 관전한 적이 있는데, 한쪽 아이들이 제대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그것을 관전한 어느 축구인이 “출출한데 뭐 먹을 거 없나?” 하는 정도의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저놈들, 졸라 빠다 맞겠구만.”
좀더 ‘구체적’인 사안으로 우리는 최근 불거진 쇼트트랙 선수들의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지금 이 사안은 ‘진실게임’으로 급속히 코너링하고 있다. 링크 밖에서, 이해·관심을 달리하는 연맹 수뇌부와 감독과 코치와 선수들과 가족들이 벌이는 다툼은, 그들이 링크 안에서 펼쳤던 코너링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유니폼 색깔을 똑같이 한다면 과연 우리 편이 누구고 안톤 오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인 쇼트트랙의 계주처럼, 현재 이 ‘진실게임’은 어느 한쪽을 심정적으로라도 지지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앞서 언급한 카유아의 근심, 즉 직접적인 이익, 냉소주의, 모든 규범의 부정이 어린 선수들이 링크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그 한 줌의 순정성마저 지배해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국민적 관심사’인 쇼트트랙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이는’ 영역으로 밀려 올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바깥에,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영역에 얼마나 지독하고 끈질긴 병폐와 폭행과 위계와 협잡이, 어느 특정 개인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 아니라 거의 ‘네트워킹’ 차원에서 미만해 있을지, 그 점이 걱정이다. 우리는 얼마 전 대학 축구팀과 심판의 충격의 네트워킹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때에, 굼브레히트의 다른 관점에서 ‘스포츠를 찬양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하는 한숨은 결국 우리 몫이 되고 만다. 학술적 개념 이전의 상태, 그러니까 개념으로서 ‘문명성’이니 ‘야만성’이니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야만적인 상태가 사법적 차원에서 횡행하는 것이 한국 스포츠의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경기장 바깥의 일을 말끔히 잊고 경기에만 몰입하고 찬양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사고를 윤리의 진공 밀폐용기에 넣어두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격을 함양하겠다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이는 어쩌면 장외 ‘관전자’의 한가로운 객담일 것이다. 채널을 돌리면, 국경 바깥의 스포츠 혹은 스포츠 바깥의 유희가 지속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그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락앤락’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에잇 까짓,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하면서 그 심각한 네트워킹을 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정말로 그 어린 선수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폭력과 협잡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킹의 소도구(또는 미디어가 피상적으로 읊어대는 ‘피해자’)였다가 이제는 ‘진실게임’이라는 링에 직접 뛰어들어 사건 당사자가 돼버린 상태! 앞으로 우리는 그 선수들이(혹은 그들의 후배가) 강렬하고도 매혹적으로 코너링을 할 때, 당연히 그들의 질주에 동반해 환호하면서도 혹시 저 속도에 ‘편승’한 은밀하고 추악한 네트워킹은 없는가, 문득 생각할 것이다.
진위를 다투는 사법의 문제고 어린 선수들의 명예와 영혼이 담긴 문제인데,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러니까 한가로운 관전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스포츠의 열정적인 한순간을 이제는 맘껏 환호하거나 몰입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앞서 굼브레히트의 은 사려 깊게 읽을 경우 밑줄 그어둘 만한 문장이 없지 않다고 했는데, 그런 지적 바탕 없이도 단번에 밑줄을 그을 만한 문장이 있다. 그가 인용하기를,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어느 다이빙 코치는 자기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바친 스포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인격을 함양하고 싶으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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