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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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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 재건의 펀치를 날려라

11전 연속 KO승으로 IBO 챔피언에 오른 김지훈에게 거는 기대
“공중파 TV 로열타임에 권투 경기를 다시 보려나”
등록 2009-09-23 15:10 수정 2020-05-03 04:25

한국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은 박태환과 김연아 선수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박태환·김연아 선수가 없던 시절의 한국 수영과 피겨스케이팅 경기장은 ‘한데볼’이라 불렸던 핸드볼보다도 관중 수가 적었다. 그러나 박태환 선수가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오른 뒤 2007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자유형 400m를 잇따라 석권하고, 김연아 선수가 그랑프리대회에서 밥 먹듯이 우승을 차지하다가 2009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은 이른바 ‘메이저 종목’으로 승격했다.

김지훈 선수.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김지훈 선수.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반대의 길을 걸은 종목도 있다. 프로복싱은 1960~80년대 프로레슬링과 더불어 한국 스포츠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지만 90년대 초반 세계 챔피언 유명우·장정구 선수가 잇따라 은퇴한 뒤 마이너 종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로야구 등의 인기에 밀렸다고는 하지만 스타플레이어 부재가 더 큰 이유였다.

‘한국 복서들의 무덤’ 라스베이거스에서 값진 승리

그런데 이런 프로복싱의 부흥을 기대할 만한 선수가 나타났다. 김지훈이다. 김지훈은 한국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미국의 세계적인 프로복싱 에이전트 배너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매 경기 1만달러, 세계 타이틀 도전 경기 4만달러, 챔피언에 오를 경우 7만5천달러 이상을 받는 조건이었다.

김지훈은 배너와의 계약에 따라 지난해 5월 세계 프로복싱의 메카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슈퍼페더급 논타이틀매치에서 그루지야의 코바 고골라지를 1라운드 KO로 꺾었다. 고골라지 선수는 김지훈과 싸울 당시 22전20승(8KO)2패의 화려한 전적에 세계권투기구(WBO) 타이틀에도 도전한 바 있는 실력파였다. 김지훈은 지난 3월 라스베이거스에 벌어진 길버트 살리나스와의 경기에서도 8회 KO승을 거둬 코바 고골라지를 1회 KO로 꺾은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다시 입증했다.

두 번의 승리는 ‘한국 프로복서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더욱 뜻깊었다. 1982년 김득구 선수가 세계권투평의회(WBC) 라이트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레이 맨시니 선수에게 KO패를 당하고 사망한 뒤, 라이베이거스에서 있었던 20여 차례의 경기에서 백인철·김광선 등 내로라하는 한국 복서들이 거의 모두 KO로 무너졌다.

김지훈은 드디어 지난 9월1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진 국제권투기구(IBO) 슈퍼페더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졸라니 마랄리에게 9회 KO승을 거두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IBO는 전통 있는 WBC, 세계권투협회(WBA), 국제권투연맹(IBF)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선수들이 거의 모두 랭킹에 올라 있는 기구다. 이날 승리로 지난 2007년 7월 지인진이 종합격투기로 옮기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WBC 페더급 타이틀을 자진 반납한 이후 2년2개월 만에 우리나라에서 44번째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다.

김지훈은 1987년생으로 올해 나이 22살이다. 17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복싱을 시작해 이제 5년차를 맞이했고, 아마추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프로 초창기에 많은 ‘검은 별’(복싱에서 패하는 것)을 달아 5패를 기록하고 있지만, 2005년 한국 페터급 챔피언, 2006년 범아시아권투연맹(PABA) 페더급 챔피언에 오르면서 연승 행진을 시작해 이번에 IBO 타이틀을 획득할 때까지 11전 전 KO승을 이어가면서 통산 성적 24전19승(16KO)5패를 기록하고 있다.

김지훈은 역대 국내 정상급 프로복서들의 장점만 딴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태식(전 WBA 플라이급 챔피언)의 살인적인 훅, 홍수환(전 WBA 밴텀급·주니어페더급 챔피언)의 자로 잰 듯한 스트레이트, 그리고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WBA 주니어미들급)의 후벼파는 듯한 어퍼컷을 모아놓은 듯하다. 프로복싱의 3대 기술 훅·스트레이트·어퍼컷 모두에 능수능란한 것이다. 여기에 유명우(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의 연타 능력과 장정구(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의 링제너럴십(Ring Generalship·링 위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능력)까지 갖췄으니, 프로복싱계에서는 김지훈이 수영의 박태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처럼 프로복싱의 옛 영화를 되찾게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훅·스트레이트·어퍼컷 능력에 정신력까지 갖춰

물론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지훈은 수비가 약해 많이 얻어맞고, 슬로 스타터다. 따라서 초반에 강타자를 만나 기습 펀치를 허용하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김지훈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도 “내 약점을 잘 안다. 그러나 한 대 맞으면 10대를 때리겠다는 각오로 링 위에 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김지훈의 정신력과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김지훈은 지난 9월15일 IBO 슈퍼페더급 타이틀을 획득하고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누구와 어디서 붙어도 자신 있다. 최종 목표는 필리핀의 매니 파퀴아오(5체급 챔피언, 현역 최고의 프로복서)와 싸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지훈은 오는 10월10일 ‘프로복싱 코리아 콘텐더’ 라이트급에서 안병근 선수와 결승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이기고 11월에 벌어질 프로복싱 코리아 콘텐더 왕중왕전에서 우승하면 WBC 라이트급 챔피언 베네수엘라의 에드윈 발레로에 도전권이 주어진다.

만약 김지훈이 이 무대에 선다면 과거 유재두·홍수환·유명우·장정구 선수의 전성기 때처럼 공중파 TV의 로열타임에 프로복싱 경기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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