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구미(勝ち組)와 마케구미(負け組).
한국말로 하자면 ‘사회적 승자’와 ‘사회적 패자’다. 한국과 일본 중산층의 공통점을 물었더니, 야마모리 도루 도시샤대학 교수(경제학)는 두 단어를 꺼냈다. “일본에서도 자신이 중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계층은 (자녀 가운데) 될 놈(가치구미), 안 될 놈(마케구미) 집단을 구별해서 ‘될 놈’이 되도록 투자한다는 점에선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치구미는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엘리트 그룹을 일컫는 말로,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 이긴 사람을 뜻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일본 상대적 빈곤율 16% </font></font>
야마모리 교수는 도시샤대학 제자들 가운데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면접을 본다는 이유로 부모가 분노하고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부모는 교육 투자를 충분히 했으니 자식이 대학 입학에 이어 ‘취업 성공’이란 관문에서도 승리하기를 바란다. 몇 달 전 국회의원 등이 자녀 취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한국의 ‘현대판 음서제도’ 논란과 비슷한 풍경이다.
그러나 일본에선 한국처럼 ‘중산층’ 혹은 ‘중류’가 큰 화두가 아니다. 왜일까? 야마모리 교수는 ‘1억 총중류’는 존재한 적 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1억 총중류가 붕괴됐다”는 이야기가 되풀이됐지만, 오히려 빈곤이나 격차 등이 핵심 문제였다는 주장이다.
1990년대 파견법이 개정돼 파견 대상 업종이 늘어난 뒤, 1994년 20.3%에 불과했던 일본의 비정규직 비율은 최근 38%까지 늘었다. 중위소득 50% 미만인 계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상대적 빈곤율도 1985년 12%에서 꾸준히 상승해 2009년 이후로는 16%를 넘어섰다(그림 참조). 지난해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7.9%로, 한국과 일본의 빈곤율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0위권 이내에서 매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실제 200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빈곤에 반대하는 운동이 사회적 반향을 얻으며 확산됐다. 2008년 도쿄 히비야공원에 파견노동자와 실직자, 노숙자 등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인 ‘파견촌’이 대표적이다. 파견촌 촌장을 맡아 유명해진 빈곤운동가 유아사 마코토는 일본 사회를 “사회로부터 서서히 배제되면서 빈곤의 나락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며 ‘미끄럼틀 사회’라 이름 붙인 바 있다.
유아사와 함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비영리법인(NPO) ‘모야이’ 활동을 주도한 오니시 렌 대표는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터진 이후 노숙자(홈리스)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신주쿠 등 도쿄 중심지에서 홈리스들이 자주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월 10만엔 이하로 생활하는 상대적 빈곤 계층이 6명 중 1명꼴이다. 그런데 실업률은 3%밖에 되지 않는다. 일하면서도 빈곤 상태에 처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경기침체, 비정규직 확대 등만이 빈곤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혼자 사는 세대가 늘어나고, 노인에 대한 가족 부양이 줄어들면서 빈곤이 더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잘나갈 때는 정부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기업이나 가족이 책임지면 되니까. 그러나 지금은 저출산·고령화 탓에 가족도, 경기침체로 기업도 빈곤의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 이 와중에 아베 정부는 최근 생활보호급부금을 6% 삭감했으며, 연금도 줄어들고 있다. 가족도, 기업도, 정부도 빈곤을 도와주지 못하는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오니시 렌 ‘모야이’ 대표)
‘마케구미’가 되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의 선택지는 분노 아니면 체념뿐이다. 지난 6월30일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로 일하다가 실직한 70대 노인이 신칸센에서 분신해 본인과 다른 탑승객 1명이 숨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실직 뒤 연금 월 12만엔(약 113만원)으로 살아온 노인은 “늙은이는 빨리 죽으라는 것이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야마모리 도루 교수는 “신칸센 사건은 빈곤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엔 노인 등 빈곤층이 일부러 경범죄를 저질러 감옥에서 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일본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일본이 한국의 미래라고 설명하는 경제학자나 정부 관료도 많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국이 ‘헬조선’과 ‘금수저·흙수저’에 분노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격차사회와 불평등, 중류층 붕괴에 대해 뜨겁지 않다. 을 쓴 노동사회학자인 하시구치 쇼지는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은 계층의식이 명확하거나, 계층문화가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다. 중류층이 무너졌다는 것보다 빈곤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들어 빈곤에 반대하는 운동이 활발해지긴 했지만, 중류층이 움직인 건 최근 안보법 반대 투쟁 정도에 불과하다. 계급이나 불평등 등 경제적 상황을 둘러싼 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야마모리 교수 역시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리 계급이나 계층을 대표하는 문화와 정치가 없어서 한국과 중국과의 긴장관계를 활용해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보수 정권의 전략이 통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베 정부는 이런 중류층 붕괴나 불평등 완화에 얼마큼 관심이 있을까? 아베 신조 총리는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통해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대기업에 임금 인상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이 덕분인지 일본 전체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지난 7월 27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년 대비 0.3% 상승했다. 중산층이 지갑을 닫을 것을 염려해 아베 정부는 소비세를 8%에서 10%로 올리려던 계획도 2015년 10월에서 2017년으로 미뤘다. 그러나 또렷한 답이 보이진 않는다. 아베 정부는 최근 사회보장 재정비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재정지출 확대와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재정적자라는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탓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냐”는 질문에 이강국 리쓰메이칸대학 교수(경제학)는 “일본은 80살 이상 노인이 1천만 명이 넘는 나라다. 노인 세대 내의 불평등이 훨씬 심각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전체 불평등도 더 커졌다. 일본 정부는 재정을 많이 쓰더라도 연금과 복지로 노인 빈곤을 해결하고 있는데 한국은 대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한국의 65살 이상 가구의 노인 빈곤율은 50%에 육박한다. 일본은 20%대다. ‘가치구미’ 중산층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마케구미’ 빈곤 노인 수백만 명이 폐지를 줍는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도쿄·교토(일본)=<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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