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불황 속에서 영업이익이 늘어나고 있는 기업.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에서 장기근속 직원이 증가하는 기업. 덴마크의 제약업체 노보노르디스크다.
‘모래시계 중산층’ 기획을 통해 바라본 한국의 중산층을 위협하는 원인은 대기업의 고용 관행이었다. 지난 10년간 노동패널 조사 분석을 통해 중산층의 몰락을 연구한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중산층을 이루는 중간계급(대기업 직원)이 사라지는 것은 명예퇴직·조기퇴직 등 한국 대기업이 사람을 소모적으로 부리고 내팽개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좋은 일자리는 좋은 기업의 몫고용 관행뿐만이 아니다. 한국 기업은 최근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이익이 줄어들고 있다. 기업 생존의 위기는 고용 관행과 만나 사람을 내보내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 구조 악화와 관행이 맞물리면서 안정적인 중산층 일자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결국 안정적인 중산층을 만드는 것은 좋은 일자리다.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좋은 기업의 몫이다. 기업의 관점에서 중산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난 9월 덴마크의 노보노르디스크를 찾았다. 노보노르디스크는 연매출액 292억달러를 기록한 덴마크 제2의 기업이다. 본사는 수도 코펜하겐 중심지에서 기차로 40여 분 가야 닿는 한적한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넓은 부지 위에 자리잡은 여러 연구동을 지나 중앙 건물에 도착하니 미디어 담당자인 메테 크루세 다닐센이 반겼다. 다닐센의 안내로 받은 회사 방문증에는 “긴급상황에는 112로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당신의 안전이 우리의 최우선”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함부로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보안 경고문이 담긴 방문증을 받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노보노르디스크 중앙 건물은 원형 구조의 거대한 쇼핑몰처럼 중앙이 비어 있었다. 사무실은 원을 그리며 배치돼 복도로 나오면 뻥 뚫린 느낌을 줬다. 개방적 구조 속에 군데군데 책과 커피가 비치돼 있었다. 다닐센은 “누구나 편하게 자료를 찾거나 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고, 최고 경영진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복도로 나와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비서가 커피를 타주진 않는다”고 했다.
샤를로테 에르스볼 부사장도 직접 커피를 들고 회의실로 왔다. 주주·직원·고객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 참여(Corporate stakeholder engagement) 부문을 맡고 있는 에르스볼 부사장은 노보노르디스크의 경쟁력은 “기본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모든 작업장에서 충족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모성을 보호하기 위한 휴직이 가능해야 하고 직원을 위한 인권조약도 있다.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도 매년 한다. 노보노르디스크 웨이(길·Way)나 이센셜(필수·Essential)이 실제 근무환경에서 지켜지고 있는지 조사한다. 장기근속 직원과는 질적 인터뷰를 통해 실질적으로 근무환경이 개선되고 있는지 뭘 고쳐야 하는지 보고서도 작성한다.”
에르스볼 부사장은 “이것이 직원의 창의력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노보노르디스크의 경영이념을 설명하는 ‘노보노르디스크 웨이’는 “우리의 사업철학은 재무적·사회적·환경적 고려 사항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규정한다. ‘이센셜’은 “우리는 모두를 존중한다” “개인의 성과와 발전에 집중한다” “건강한 근무환경을 조성한다” 등이다.
세계인권선언을 경영이념으로 공표물론 기업이념 같은 상징적 구호는 보기 좋은 상징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보노르디스크의 행보를 보면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노보노르디스크는 1999년 ‘세계인권선언’을 일상적 경영에서도 이행할 것을 공표했다. 채용·노동조건·보수·승진·해고의 모든 과정에서 기회의 균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 노보노르디스크와 계약한 업체가 노동시간과 임금 등을 제대로 지키는지도 매해 설문지를 보내 조사한다. 또 사업이 진출한 나라의 인권과 건강권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런 경영에 힘입어 최근 (HBR)가 발표한 ‘세계 최고경영자(CEO)’ 조사에선 라르스 레빈 쇠렌센 노보노르디스크 대표가 1위로 꼽혔다. 올해 조사에서는 예년과 달리 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성과를 20% 반영했는데, 노보노르디스크는 이에 힘입어 세계 유수의 기업을 누르고 최고 회사로 선정됐다.
이 회사의 경쟁력은 ‘우리의 사명은 당뇨병의 치료를 강화하고 앞서가는 것’이라는 노보노르디스크 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90여 년간 엄청난 규모로 회사가 성장했지만 노보노르디스크는 당뇨병을 중심에 두고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에르스볼 부사장은 “북유럽의 다른 기업들은 합병도 많이 하고 여러 분야에 손을 많이 댔는데 그러면서 처음의 가치를 잊게 됐다. 우리는 창립 시기에 가졌던 중심 가치를 잊지 않고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는지를 항상 상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창업 이념을 세운 창업주 가족이 경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창업주 가족은 회사 주식을 안정적으로 보유한 재단을 맡고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일찍부터 노보노르디스크는 가족이 경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했고, 그 결과 가족과 경영을 분리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덴마크에도 가족이 소유한 기업이 많다. 가족 경영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레고의 경우 가족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레고는 최근 실적이 떨어졌다가 가까스로 회복됐다. 그런 경험을 통해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에르스볼 부사장은 “노보노르디스크 재단은 주식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제약회사 특성상 필요한 10년, 15년의 장기 연구를 단기 성과 없이 진행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준다. 대학에도 연구소를 만들어 기초 연구를 지원해 당뇨병 연구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재단의 역할을 설명했다.
11명 이사진 가운데 4명이 노동자 대표창업자 후손 대신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직원들이 뽑은 노동자 대표다. 11명의 노보노르디스크 이사진 가운데 4명은 직원들이 뽑은 대표다. 덴마크 상법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노동자 대표는 4년에 한 번씩 선출되며 재임도 가능해 전문경영진 못지않은 전문성을 갖는다. 노동자 대표 이사 가운데 여성은 2명으로 이사회(남 8명·여 3명, 2014년 연간보고서 기준)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에르스볼 부사장은 “이사회를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하면 이사들이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통해 균형 잡힌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효과”라고 설명했다. 노보노르디스크 이사진의 국적도 덴마크가 5명이고, 나머지는 스웨덴·노르웨이·영국 등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세계 각국의 직원들이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배경은 다시 기업의 경쟁력으로 선순환된다.
현대 기업의 일자리는 호황·불황 등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도와 기업의 문화, 사회적 관행으로 만들어진다. 노보노르디스크는 안정적인 중산층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기업 역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음을 보여준 또 다른 ‘복지천국 북유럽’의 모습이었다.
코펜하겐(덴마크)=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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