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중산층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비용 가운데 하나는 교육비다. 자녀가 초·중·고등학교 때는 학원 등 사교육비가, 대학교에 가면 한 학기 수백만원에 이르는 등록금이 가정의 경제를 옥죈다. ‘모래시계 중산층’ 첫 이야기(제1080호 표지이야기)에서 살펴본 세 가정 모두 수십만원에서 100여만원에 이르는 교육비를 매달 쓰고 있었다. 이들은 자녀를 위해 노후를 대비해야 할 자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부모들이 했던 투자만큼 자녀가 교육을 통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런 도움마저 힘든 젊은이들은 사회로 나갈 때부터 빚이 된 대학 등록금을 어깨에 지고 나간다.
패전 뒤 위기 극복하려 의무교육 시작
중산층이 두꺼운 나라 덴마크는 교육비 부담이 없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교육비 부담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항상 “노”(아니요) 또는 “프리”(공짜)라고 말했다. 오히려 덴마크는 대학생에게 매달 760유로(약 98만원)를 지급해 생활비에 대한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하도록 돕고 있다. 물론 교육에 쓰이는 돈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국민이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야 가능한 시스템이다.
무상급식 이후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한국의 교육 현실을 보면서 덴마크는 어떻게 다른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또 무상교육이 두꺼운 중산층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었다. 지난 9월 코펜하겐에서 덴마크 교육부의 예른 스코우스고르 국제교류부문 수석고문을 만났다.
“덴마크 대학생들은 한 달에 760유로를 받는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생활비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돈에도 세금이 붙는다. (하하)”
등록금이 없는무상교육을 하는데다 돈까지 주는 이유는.“덴마크는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평등이 중요하고 균등한 기회를 갖는 게 복지국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데, 교육을 통해 균등한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지원금을 받아 주거비용이나 식비를 해결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정권이 우파나 좌파로 교체돼도 무상교육의 틀은 영향 받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니까.”
덴마크는 국내총생산(GDP)의 8.7%를 교육비에 쓴다. 재정에 부담을 줄 만큼 큰 액수다. 올해 덴마크 총선에서는 ‘복지예산 확대’를 내건 좌파를 누르고 우파가 승리했다.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고 줄이자는 이야기는 없나.“없다. 교육예산은 대부분 초등교육에 쓰인다. 어린이들에게 많은 예산을 쓰고 있어서 교육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저항은 없다.”
정권 바뀌어도 무상교육은 그대로 평등을 핵심 가치로 하는 무상교육은 언제 시작됐나.“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사회 발전은 위기로부터 시작한다. 덴마크는 19세기에 큰 변화가 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덴마크는 땅을 다 잃었다. 농사도 황폐화됐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는 등 당시 덴마크는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의무교육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랜 전통을 가진 무상교육이 지금의 형태를 띤 것은 1950년대부터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중산층은 균등한 교육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성의 고용률도 높아져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게 필요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가.“그렇다. 계층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교육이든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덴마크는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인생의 경로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예른 스코우스고르 수석고문은 한국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 덴마크와 한국을 곧잘 비교했다. 그를 찾아간 이유는 ‘한국의 비싼 교육비가 젊은이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사회적 신분 상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아메리칸드림’의 나라 미국보다 덴마크를 꼽는다. 그러나 예른 스코우스고르 고문의 이야기는 ‘공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좋은 교육을 받아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계층 이동 사다리’로서 교육의 역할은 어떻게 생각하나.“한국과 덴마크는 사회가 다르다. 덴마크는 의사와 벽돌공 사이에 연봉 차이가 크지 않다.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무상의료를 하는 나라다. 세금을 걷어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택시운전사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해준다. 덴마크 부모들은 자녀가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 생각한다. 핵심은 계층 간 차이가 거의 없고 세금을 통한 분배가 이뤄지기 때문에 학교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니라 학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곳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엘리트가 있어야 사회도 발전하고 경제력이 높아진다고 여긴다.“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한국처럼 모든 아이들이 좋은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 반의 아이들이 모두 재능이 다르고 학업 성취도도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춰 교재를 제공한다. 물론 덴마크 정부도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다. 덴마크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뒤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다. 1년 정도 놀면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데, 정부 입장에서는 비용 손실이다. 돌아와서 다시 배워야 하고 노동시장에 나가는 시간이 지연되니 그만큼 비용이 커진다. 이게 덴마크 사회의 위험 요소이기도 해서 금전적 인센티브를 줘서 빨리 대학에 가도록 하고 있다.”
모두의 인생에 동기를 주는 교육 꿈꿔중산층을 두껍게 할 해법으로 무상교육을 취재하러 왔는데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덴마크는 누구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싸우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덴마크는 소득수준의 차이가 한국만큼 크지 않다. 세금을 통해 재분배되기 때문에 특정 집단만이 중산층이라 하기보다 모두가 다 중산층이다(Denmark is one big middle class). 중산층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한국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변변찮은 직업을 가지면 내가 공부를 못해서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인생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덴마크는 스스로 선택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는 동기가 높이 부여되는 게 덴마크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코펜하겐(덴마크)=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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