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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똑같이 든 언론 자유의 깃발

방송 3사 최초 공동 파업 동행 취재 ‘상처 딛고 파업 나선 YTN’ ‘중견 움직이며 분위기 바뀐 한국방송’ ‘간부들도 흔들리는 문화방송’… 총선 뒤 결정적 국면 맞을 듯
등록 2012-03-14 17:11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3월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방송문화진흥회 건물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문화방송 노조원들. <한겨레21> 탁기형

» 지난 3월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방송문화진흥회 건물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문화방송 노조원들. <한겨레21> 탁기형

방송 3사 최초의 공동 파업이다. ‘공정방송 복원, 낙하산 사장 퇴출, 해고자 복직.’ 공영방송인 문화방송과 한국방송, 공기업 YTN 등 방송 3사의 노조 조합원이 단일한 깃발 아래 모여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 실패를 선언했다. 그리고 공동투쟁위원회를 꾸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징계를 받은 언론인은 180여 명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언론 통폐합 이후 30여 년 만에 가장 많은 수의 언론인이 징계를 받았다. 은 방송 3사의 파업출정식이 있은 지난 3월5일부터 일주일 동안 그들과 함께했다. 그들은 이기고 싶어 했다. 무엇을 위해서일까. 이기고 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방송은 “기자 가운데 10%만 참여하는 불법행동”이라고 폄하하지만, 외부 언론의 취재를 거부할 만큼 이번 노조의 파업이 부담스럽다. 참여율도 그들의 주장과 달리 부장·팀장급과 정치부 기자들을 제외한 보도본부 대부분이 일손을 놓은 상태다.
“해고자 복직과 공정보도, 사장 퇴진!”

노종면이 울었다. “3년 만이죠.” 그는 이명박 정부의 첫 해직기자다. 2008년 8월,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낙하산 인사’로 불린 구본홍 사장 선임 반대 시위를 노조 위원장 자격으로 주도했다. 그해 10월 우장균·현덕수·조승호·권석재·정유신 기자 등 노조 간부 5명과 함께 해고됐다. 그리고 2009년 파업 직전 경찰에 체포돼 구속됐다. 그래서 지난 3월8일의 파업집회가 그에게는 남다르다. 해직된 지는 1250일째, 그 사이 구본홍 사장에 이어 배석규 사장이 임명되고 연임이 사실상 확정되자 노조는 파업을 선언했다.

“저는 노조의 총파업 지침을 어기고 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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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인 는 ‘뉴스 및 정치’ 분야에서 에 이어 2위를 기록 중이다. 그의 발언에 귀기울이는 3년 만의 파업에 임하는 조합원들의 표정이 엄숙하다. YTN 파업은 3월8일부터 48시간 동안이다. YTN 건물 로비를 가득 메운 조합원 수가 200명에 달한다. 김종욱 YTN노조 지부장은 ‘3년 전의 상처’를 언급했다. 당시 6명이 해고됐고 조합원 40여 명이 중징계를 비롯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파업의 상처는 깊었다. 이후 파업을 결정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구성원들끼리는 우리가 파업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데….”

김도원 기자는 솔직했다. 입사 6년차다. “해고된 선배들만 복직되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어요.” 이 말이 내포하는 바는 간단치 않다. 3년 전 YTN이 파업할 당시 보도채널 MBN의 시청률이 YTN을 따라잡았다. 그때 따라잡힌 시청률이 지금도 그대로라는 내부 구성원들의 한탄은 시청률이 방송사의 생존과 직결되는 현재 방송판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 사이 MBN은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이 됐다. ‘TV조선’ ‘JTBC’ ‘채널A’ 등 종편, 연합뉴스의 보도채널 ‘뉴스Y’도 출현했다. YTN 사 쪽은 지난 3월6일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생존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행위를 자제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밥의 논리는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종편 등과의 경쟁에 직접 노출돼 있는 YTN의 현실과 온갖 특혜에도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종편의 초라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48시간 파업 뒤 이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김 지부장은 앞일에 대해 조심스러워했다. 김 지부장은 “일단 다음 단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며 “3년 만의 파업을 별 탈 없이 지켜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김 지부장은 “해고자 문제뿐만 아니라 현 정권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BBK 의혹 단독 취재나 민간인 사찰 의혹 등의 보도가 묵살되거나 보류됐다”며 “해고자 복직과 공정보도, 배석규 사장 퇴임이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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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보다 이틀 앞선 지난 3월6일, 한국방송의 파업 첫날이다. 집회 장소로 가는 길은 42인승 버스 2대가 막아서고 있었다. 가로막은 버스가 연출하는 장면은 한국방송의 9시 뉴스에서 보도됐던 25년 전의 육성과 함께 기시감을 불러온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다음날 정치부였던 김인규 기자(현 한국방송 사장)의 멘트다.

» 지난 3월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 출석하러 나온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 <한겨레21> 탁기형

» 지난 3월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 출석하러 나온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 <한겨레21> 탁기형

보도본부 대부분 일손 놓은 한국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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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은 창당 때부터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당원들의 당비에 의해 당을 운영해나가는 자립 정당상을 우리나라 정당사상 처음으로 확립하고, 구시대적 정치 병폐의 재현을 막기 위한 청렴정치에 앞장서왔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앞에 시위대를 막으려고 쌓아올린 ‘명박산성’은 기자의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한국방송의 경비 인력 4명은 날이 선 눈으로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취재는 불허”라는 말이 돌아왔다. “취재가 허락된 언론사는 없다”며 “기다리라”는 말을 반복했다. 집회는 시작되고 사장 퇴진의 구호가 들려왔다. 그 사이 홍보팀 관계자는 “내 선에서는 (기자의 출입을) 허락해줄 수 없다”며 홍보팀장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자리에 있던 홍보팀장은 갑자기 회의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은 한국방송에서 시작됐다. 4년 전 한국방송 이사회 김금수 이사장이 사퇴하자, 한국방송 이사회의 이사진에 친정부 인사들이 임명됐다. 얼마 뒤 정연주 사장은 배임 혐의로 쫓겨났다. 정 전 사장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정권에 비판적인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예고 없이 교체하고, 제작진에게는 좌천 발령을 내기도 했다. 노골적인 통제에 먼저 움직인 것은 제작 일선의 기자·PD 직군이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힘에 부쳤다. 이들도 파업에 이르는 과정에서 YTN에 못지않은 아픈 경험을 했다. 2009년 12월 김인규 사장 선임 당시 한국방송 노동조합의 총파업 투표 부결로 파업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2010년 기존 노조와 성격을 달리하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노조)가 결성됐다. 그해 7월 새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을 이유로 1년6개월이 흐른 지난 1월, 경영진은 엄경철 전 새노조위원장을 비롯한 13명에게 정직·감봉 등의 징계를 내렸다. 이번 파업도 새노조가 주도한다. 2010년 박재완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논문 이중 게재 보도를 막고, ‘천안함’ 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도록 하고, ‘4대강’ 편을 제때 방송하지 못하도록 한 인사의 보도본부장 임명 반대에서 시작된 한국방송 기자회와 경영진의 갈등이 도화선이 됐다. 결국 기자회가 지난 3월2일부터 제작을 거부했고, 노조는 김인규 사장 퇴진을 내걸고 파업을 결의했다. 한국방송의 사 쪽은 “기자 가운데 10%만 참여하는 불법행동”이라고 폄하하지만, 외부 언론의 취재를 거부할 만큼 이번 노조의 파업이 부담스럽다. 참여율도 사 쪽의 주장과 달리 부장·팀장급과 정치부 기자들을 제외한 보도본부 대부분이 일손을 놓은 상태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정치부 기자들의 태도다. 정부 편향적 보도가 이번 파업을 불러온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외부의 시선과 달리 이들은 나름의 ‘확신’을 보인다. 한국방송의 사원용 게시판에는 “단 한 번도 뉴스나 프로그램을 특정 정권을 위해 만들거나 헌납한 일이 없다”며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기자들의 가치관과 관점도 존중해주기 바란다”는 16년차 기자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 한국방송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의 파업 출정식이 열린 지난 3월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 본관 앞을 회사 버스가 가로막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 한국방송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의 파업 출정식이 열린 지난 3월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 본관 앞을 회사 버스가 가로막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간부들도 파업 대열에 동참한 문화방송

우여곡절 끝에 파업은 시작됐다. 한국방송 의 서수민 PD가 개그맨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노조원의 본분을 앞세워 파업에 참가했고, 파업에 참가하는 10년차 미만의 젊은 기자 10여 명이 모여 ‘Reset 뉴스9’를 팟캐스트 등 인터넷에 내건다. 내곡동 사저, BBK, 4대강 등을 준비 중이다. 기자들의 적극적인 파업 참여에도 외견상 한국방송은 별일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위기는 2009년 때와 사뭇 다르다. 원인은 외부에 있다.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며 여당의 재집권이 불투명해지면서다. 그 자기장은 내부의 균열을 일으킨다. 한국방송의 10년차 이상 중견그룹이 움직였다.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극적 반전을 먼저 겪고 있는 건 문화방송 쪽이다. 문화방송 경영진은 3월 들어 박성호 기자회장, 이용마 노조 홍보국장 등 2명을 해고했다. 이근행 전 노조위원장과 정대균 전 진주 문화방송 노조위원장이 해고된 지 2년여 만이다. 이번 해고 조처를 두고 내부 구성원의 반발은 즉각적이다. 기자 166명이 이에 반발해 사직 결의에 나섰다. 20년차 이상 간부급 사원 135명이 기명으로 사장 퇴진 성명을 냈다. 간부들이 흔들리자 경영진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김재철 사장은 최근 법인카드 불법사용 의혹까지 터져 더 거센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난 3월7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김 사장은 ‘전 사원의 프리랜서화’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나아가 “예능과 드라마는 100% 외주 제작으로 돌리겠다” “이번 파업에 동참해 사퇴한 보직은 아예 자리를 없애고 남아 있는 보직간부를 우대하겠다” “앞으로 MBC 공채는 없다” 따위의 발언에서는 파업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난다. 역설적으로 현재 문화방송 경영진의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1987년도였습니다. 서대문서에 출입하고 있을 때였어요.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당시 MBC 로고가 새겨진 차에 타고 명동성당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야, MBC다!’라며 쫓아왔습니다. 차는 파손됐습니다. 그 고초를 겪은 지 25년 만입니다. 최근 FTA 반대 집회에서 후배들이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고초를 저는 이해합니다. 그래서 앵커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25년 전으로 후퇴했습니다.”

지난 3월5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문화방송·한국방송·YTN 파업 출정식의 연단에 오른 최일구 뉴스데스크 앵커의 말이다. 한국방송은 과거의 육성으로, 문화방송은 현재의 발언으로 방송 현실의 과거 회귀를 증명하고 있다. 파업은 40일을 넘어섰다. 가 보도돼야 하는 시간에 건강 다큐멘터리가, 은 재방송으로 채워진다. 이호찬 기자는 대신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만들고, 김태호 PD는 녹화를 해야 할 시간에 집회 자리를 지킨다.



기자 166명이 사직 결의에 나섰다. 20년차 이상 간부급 사원 135명이 기명으로 사장 퇴진 성명을 냈다. 간부들이 흔들리자 경영진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김재철 사장은 최근 법인카드 불법사용 의혹까지 터져 더 거센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방송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의 파업 출정식이 열린 지난 3월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 본관 앞을 회사 버스가 가로막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한국방송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의 파업 출정식이 열린 지난 3월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 본관 앞을 회사 버스가 가로막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3월16일 방송 3사 파업 콘서트 열려

언제까지 갈까. 결정적 국면을 4·11 총선 이후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낙하산 사장 임명으로 분란의 씨앗을 뿌린 청와대와 여당으로선 무리하게 경영진 편을 든다는 인상을 줘 여론을 악화시키기보다는 큰 충돌을 피하는 수준에서 갈등 수위를 조절해나가려 할 것이고, 결정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노조 역시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파업이 권력의 힘이 약화된 임기 말에 일어났다는 사실과, 총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연우 세명대 교수(광고홍보학)는 “이번 연대파업은 2008년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 축출 국면이나, 2009년 미디어법 총파업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며 “방송 3사의 연대파업은 총선 국면에서 공천이 마무리되고 정치적 공방이 본격화하는 시점에 이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3월16일, 방송 3사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여 파업 콘서트를 연다. 이은미·이적·이승환·김C·DJ DOC·드렁큰타이거 등이 출연하고, 방송인 김제동이 사회를 볼 예정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방송 노조 파업 약사

일관된 장악 시도, 끝없는 저항 노력

한국의 방송사 파업은 1988년 8월 문화방송이 시초다. 1987년 12월 방송사로는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설립된 문화방송에선 1988년과 1989년 파업을 통해 황선필·김선규 사장 퇴진과 보도국장·교양제작국장 추천제를 따내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1988년 5월 출범한 한국방송 노조도 같은 해 8월 준법투쟁을 통해 본부장 추천제를 마련하고 첫 민선 사장인 서영훈씨를 맞게 된다.

문화방송 노조가 연거푸 관선 사장을 몰아내고 한국장학회법을 무산시키는 등 강력 투쟁을 펼치고, 문화방송보다 조직 규모가 훨씬 큰 한국방송도 노조를 중심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자, 위협을 느낀 노태우 정부는 1989년부터 한국방송·문화방송 민영화 등이 핵심인 방송구조 개편 카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여차하면 공영방송사를 해체하고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노조를 무력화하겠다는 엄포였다.

결국 1990년 정부와 방송 노조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정부가 노조에 협조적이던 한국방송 민선 사장 서영훈씨를 ‘법정수당 오지급’ 사건을 빌미로 축출한 뒤 그 자리에 5공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서기원씨를 앉히자 사원들이 반발했다. 사원들이 서 사장의 출근을 저지하자 그해 4월12일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병력을 투입해 사원 117명을 연행했고, 분노한 사원들은 제작 거부에 돌입했다. 4월30일 정부가 경찰을 다시 투입해 사원 333명을 연행하자 문화방송과 기독교방송 사원들이 동조 제작 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5월17일 사원들의 제작 거부 철회로 봉합된 갈등은 6월 정부·여당이 민영방송 허용과 한국방송의 채널 분리, 교육방송의 정부 귀속, 방송위원회의 심의 제재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방송구조 개편 계획을 발표해 다시 한번 불이 붙는다. 한국방송·문화방송·기독교방송에 평화방송 노조까지 가세해 방송관계법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면 4사가 동시에 제작 거부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관련 법안의 기습 처리를 강행했고, 방송 4사의 연대 파업에도 아랑곳없이 7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방송사 노조의 대규모 연대 파업은 1997년 초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 정점을 찍는다. 방송 노조가 선도하고 신문사 노조가 가세한 언론사 총파업은 강경 태도이던 정부가 법안 철회로 선회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2000년대 들어선 미디어법안이 날치기 처리된 2009년 방송사의 총파업이 있었지만, 규모나 강도, 지속 기간은 1990년대의 파업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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