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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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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천사를 만나다

에든버러에서 노숙할 뻔한 이방인을 구해준 거구의 사내를 첫인상만으로 의심하다
등록 2011-05-18 16:04 수정 2020-05-03 04:26
»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누군가 베푼 선행의 수혜자가 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천사 같았을까, 아니면 정말 천사였을까. 천사가 과학의 존재 증명 대상이 아니므로 굳이 따지지는 말자. 선행의 느닷없음, 곧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에서 기대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도의 도움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가 천사였다고 우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도 천사를 만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천사임이 틀림없다.

1시간 넘으면 경찰에 알려라

2000년 여름이었다. 장애학생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과 영국에 갔다. 학생들에겐 선진국 현장 견학이었고, 내겐 취재였다.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굳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어 학생들과 어울려 지냈다. 영국 런던과 셰필드에서,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한 교실에서 함께 놀며 공부하는 통합교육 현장을 둘러봤고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시설 등을 취재했다. 하루 두세 곳을 방문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대학생들은 공식 일정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정이 들기도 했고 나이 어린 여학생이 많아 나름 보호자 노릇을 했던 터라 휴가를 내고 동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스코틀랜드에 가볼 기회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숙소를 미리 구하지 못해 현지에서 부딪쳐보기로 했는데 에든버러에는 예정보다 몇 시간 늦은 밤에 도착했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수십 통 돌렸지만 여행 성수기라 빈 방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다른 승객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우리 일행만 남게 됐다. 역내 체류가 가능했다면 다른 여행객도 몇몇은 보였을 텐데 우리는 졸지에 낯선 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를 처지였다.

천사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우리는 천사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바이킹 모자만 씌우면 바로 바다에 나가도 될 듯한, 얼굴에 붉은 빛이 도는 거구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긴장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런던에서 듣던 영어와는 다른, 투박하고 거친 말투였다. 우리는 경계했다. 잘 봐줘야 역 근처 싸구려 숙소의 삐끼였다. 그는 숙소를 찾는 중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일행의 중론은 그 사람을 따라나서느니 아침까지 버티겠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나와 한 남학생이 해적과 동행하기로 했다. 남은 일행에겐 1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미안해서 더욱 고마운

에든버러가 관광명소라고 해도 도시 전체가 거의 잠든 시각이었다. 이 해적 친구는 어리바리한 아시아인들의 숙소를 찾아주려고 자기 차로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1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한 유스호스텔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에야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기차역에서 유스호스텔까지 두 차례 오가며 나머지 일행을 실어 날랐다.

일행 모두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에 사례를 하고 싶어했다. 아마 첫인상을 보고 오해했던 게 미안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천사는 거절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만나면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휭 가버렸다. 그가 그 늦은 시각,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헤어진 순간까지 한 일은 우리를 도와준 것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행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것 말고는 바란 게 없다. 그 흔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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