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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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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태평양 횡단기④폰페이의 난마돌 유적] 이 섬에 들어서는 자, 침묵하라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태평양 최고의 해양문명 유적, 난마돌…93개의 산호섬에 성을 쌓은 신비의 왕국을 찾아

▣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초빙교수·해양문화재단 이사

기획연재-적도태평양 횡단기④폰페이의 난마돌 유적

현존하는 태평양 최고의 해양문명 유적인 난마돌은 전설처럼 태평양 한복판인 폰페이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폰페이를 이탈리아의 폼페이와 혼동하곤 한다. 폰페이는 미크로네시아의 대표적 화산섬으로 높은 격조의 풍경과 화려한 적도의 꽃들, 누구나 한 번쯤은 꼭 방문하고 싶어하는 해양문명의 숨겨진 비경으로 알려진 섬이다. 필자 역시 폰페이 난마돌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오매불망 가고 싶어했다. 폰페이 동쪽의 템원섬 바로 바깥 산호초가의 마도레니브에 자리잡은 난마돌은 비밀을 간직한 고고학의 명소. 93개의 사람 손으로 빚은 크고 작은 사각형 섬이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에요”

난마돌의 초입에 들어서니 온난다습 정도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폰페이의 숲답게 고색창연한 돌마다 이끼가 무성하고 도저히 이름을 알 수 없는 적도의 풀들이 자라고 있다. 그렇게 난마돌 유적은 숲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었다. 흩어진 돌밭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얕은 성벽을 이루기도 하고 정방형의 돌이 외롭게 굴러다니기도 한다. 인공적인 돌기둥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난마돌을 관통하는 작은 도로의 축대와 주변의 돌도 모두 옛 성곽돌이다. 축대가 무너지면서 흩어진 돌을 가지런히 모아놓았다. 길바닥은 백산호로 꾸며져서 난마돌 일대가 산호섬 지대임을 말해준다. 맹그로브 뿌리와 줄기가 돌을 품은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긴 세월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텨온 맹그로브 뿌리가 끝내 돌을 품에 안았다. 타이 야유타야에서 본 불상을 품에 안은 강인한 나뭇가지가 떠올랐다. 앙코르와트가 또한 그러했다. 이렇듯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고 끝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 난마돌도 예외가 아니다.

길 안내를 맡은 원주민 앨버트가 저 앞에 가고 있다. 앨버트는 이 숲에 들어온 뒤로 말이 사라졌다. 묵묵히 그저 걸었다. 신성스러운 숲과 성터에서 말을 자제하는 것 같았다. 다리도 건너고 돌둑도 넘어서 드디어 너른 호수 같은 곳에 당도한다. 먼 발치에 돌들이 쌓여 있다. 산호섬의 성곽이 있던 곳이다. 성곽의 잔해가 물에 비친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무너진 것만은 아니다. 가지런히 축성된 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드디어, 아주 익숙한 풍경이 다가왔다. 난마돌의 그 이름난 무덤섬이다.

20세기의 뛰어난 고고학자인 윌리엄 모건은 “태평양의 그 어떤 장소도 고대 난마돌의 극적인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곳은 없다”면서 “그 인공적인 섬들과 상호 연결되는 운하들은 태평양의 베니스”라고 지칭했다.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넌다. 깊어봤자 허벅지를 넘지 않는 천해다. 야자수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바닥에는 모래에서 자라는 잘피군락이 무성하다. 돌계단을 오른다. 장중하고 역사적이기도 하고 어떤 의례를 집행하는 기분이다. 역사의 문, 의례의 문은 그렇게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난마돌 전사들이 다녔음직한 길바닥에는 백색 산호가루의 화사한 반짝임이 광채를 더해준다. 돌성은 길고도 장중하게 이어지고 그 옆으로 빙빙 돌아가면서 물이 흐른다. 운하다.

무덤섬의 복판에는 적석고분층이 있다. 고분 입구에는 사자의 문이 있다. 앨버트는 되도록 근처에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일찍이 빠져나가 저 멀리 가 있다. “ 이곳은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에요. 두려워요.”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어떤 신령의 힘, 악령의 힘 같은 것이 주변을 꽉 덮쳐누르고 있었다. 이국인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도 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고 동굴처럼 생긴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사자(死者)의 정원은 늘 그러한가. 어둡다. 돌 틈에서 한 자락 빛이 스며들어온다. 바닥에는 그 빛을 받고 살아가는 풀들도 있다. 사방의 돌들은 짜임새 있게 각을 둘렀고 빈틈이 없다. 중후한 인격을 지닌 왕이었을까, 아니면 폭력적으로 노예를 착취하던 왕이었을까. 알 수는 없으되 왕의 힘이 대단했음을 감지한다.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도마뱀인데, 무덤 안이어선지 놀라움이 컸다.

태평양의 베니스, 운하의 도시

드넓은 성벽이 길게 이어진다. 이 엄청난 성벽을 쌓으려면 투입할 노동력과 채석, 운반 시간과 방식, 축성과 높은 곳에 끌어올리는 기술 등이 계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난마돌을 만들고 경영한 사람들은 기술·노동·자본 등에서, 나아가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한 정치권력과 종교의례 등에서 어떤 우월적·압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거나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연출하고 지속해갈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돌감옥도 있다. 감옥치고는 대단히 잔인하다. 비행기로 2시간여 떨어진 산호섬 축은 철저한 모계사회였는데 화산섬인 이곳 폰페이와 그 옆의 코스라에는 수직적 부계사회다. 아울러 왕권이 형성됐다. 산호섬의 수평적 질서와 모계, 화산섬의 수직적 질서와 부계, 환경에 따라 어쩌면 이다지도 다른가!

갈수록 장중한 성은 이어지고 있다. 점점 물이 많아졌다. 외해에 다가온 것이다. 물색이 짙어지고 성들은 물가에 집을 짓고 있다. 93개의 산호섬에 성을 쌓았다는 고고학 보고서가 비로소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촘촘히 흩어져 있는 산호섬마다 성곽이 즐비하다. 카누를 타고 그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왕국을 경영했을 것이다. 한때는 적어도 수천 명이 살아가면서 수백 척의 카누가 이곳을 누비는 장관을 연출했음직하다.

흰 산호모래와 검은 돌이 대비를 이루고, 적도태평양의 일상적인 흰 구름이 저 멀리 떠 있다. 이곳 바깥은 외해다. 해도를 펴보니 수심 4천여m의 심해가 근처에서 시작된다. 수심 4천m의 심해저 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주변에 자잘한 산호섬들이 발달하고 그 섬을 이용해 난마돌 왕국은 운하의 도시, 바다의 도시를 세운 것이다.

난마돌은 하루아침에 건설된 유적이 아니다. 왕들이 바뀌면서 누적적으로 난마돌 전통을 만들어나갔으며, 난마돌 축조 자체가 역사가 되었다. 역사의 기념비로서가 아니라 난마돌 건축물과 건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로서 작동했다. 전체 지도를 보면 치밀하게 산호섬을 만들어나가고 그 위에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 산호섬은 본디 산재하던 자연적인 산호섬의 지형 조건을 십분 이용했을 것이다. 당연히 카누를 이용해 물자를 운반했으며 비상시에는 물속을 걸어다니기도 했음직하다. 아무리 깊어도 허리를 넘지 않을뿐더러 아늑한 호수 같은 산호지대에서 이렇게 태평양의 난마돌 해양문명이 번성했던 것이다.

이같은 정교한 서열과 수직구조로 상징되는 복잡한 사회구성체는 주로 고산지대가 있는 섬들에서 발전했다. 극도로 자원이 제한된 산호섬에서는 이럴 만한 인구 규모를 만들 수 없기에 불가한 일이었다. 인구압과 사회정치적 성장관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필수적인 인구 규모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껏해야 수백 명 미만의 산호섬에서는 어떤 복합적인 수직적 질서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폰페이나 코스라에 같은 고산섬에서는 대략 AD 1000년경에 인구가 수천 명에 달했다. 이러한 크기의 병합과 조직의 역사는 다양한 형식의 위계질서와 중앙집중화적 면모를 보여준다. 왜 말리노프스키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서구의 민족지학자들이 태평양의 섬을 샘플 삼아 인류 역사의 시발점과 원초성을 연구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스페인과 일본의 흔적들

폰페이의 수도인 코로니카 중심가를 두어 시간 걷는다. 중심가에 스페인벽이라고 부르는 장벽과 문이 남아 있다. 1887년 스페인은 폰페이인들이 저항을 일으키자 거대한 돌로 벽을 쌓았다. 벽은 바다로 오는 적을 방어했으며 그 안에 총독의 집과 다른 주거지, 병원, 정부의 기관 등이 들어섰다. 1890년까지 방어벽 내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40여 개의 빌딩에 모여살았고 그 자체로 스페인 건축의 전시장이었다.

폰페이에서 스페인의 통치 기간은 거의 독일의 통치 기간과 일치한다. 스페인이 최초로 점령했지만 실제적인 통치를 하지 않고 방임하자 독일이 슬쩍 들어온다. 1885년까지 캐롤라인제도 무역의 80%는 독일의 수중에 있었다.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는 회사가 야프와 코스라에, 폰페이에 있었다. 1885년 10월13일에 전함 알바트로스가 독일 국기를 섬에 휘날린다. 폰페이의 다섯 왕국과 독일 사이의 협정에서 폰페이 왕들은 카이제르에게 주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 어떤 역사 현장보다도 태평양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을 먼저 찾아가보았다. 소케스 저항자 떼무덤은 콜로니카 시내에 위치한다. 1911년 2월24일 원주민 젊은이 15명은 독일 지역관리 구스타브를 살해한 죄로 독일 식민당국의 지시를 받은 멜라네시아 병사들에 의해 처형된다. 땅에 구멍을 파고 맹그로브 장대를 코코넛 나무 사이로 가로질러 그 장목에 젊은이들을 묶었다. 반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마니도카롱이 자신이 파묻힐 구멍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들을 파묻을 곳이구나. 그 안에 물이 있구나.”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묶여서 조용히 자신의 처형을 기다렸다. 오늘날 무덤 현장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주 초라한 무덤. 구덩이 위에 흙만 덮어놓은 이 집단 매장처를 현지인조차 아는 이 거의 없어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다. 다행히 입간판이 하나 서 있고, 촌장은 어느 동방의 외국인이 자신들의 독립운동가 무덤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 안내인 앨버트와 무덤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집단 매장처에서 불과 5분여 거리에 독일 식민당국자들의 무덤이 있다. 교회 뒤의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돌을 다듬은 비각과 호사스런 문장이 눈을 끈다. 개중에는 소커의 반란에 죽은 병사의 무덤도 있다. 독립군과 식민군의 무덤을 대비하면서 태평양의 지난 역사를 다시 한 번 반추해본다.

폰페이에서도 일본을 논외로 할 수 없다. 1914년 10월7일, 일본 군함 4척이 콜로니카로 입성하며 일장기를 올린다. 일본은 독일이 지배했던 미크로네시아를 1920년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접수하고 합법적 통치를 시작한다. 식민도시 콜로니카는 1930년대 중반에 1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행정·문화·상업 센터가 돼 황금시대를 누린다. 상수도가 개설되고, 전화·전기가 가설된다.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7개의 가게, 7개의 빵집, 어탕과 쌀밥을 파는 20개가 넘는 레스토랑, 그리고 도살장과 푸줏간, 약방, 세탁소, 선물가게, 도매상, 허가받은 술장사 등이 있었다.

거의 모든 시설은 일본인 전용으로 원주민들은 그곳에서 살지 못했다. 행정당국은 약간의 폰페이 사람을 경찰, 야간 순찰대, 통역 등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일본 여성과 폰페이 남자들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됐으며, 특히 일본 기생들이 있던 9개의 유곽에서 출입이 금지됐다.

환경재앙, 투발루 밖에도 많다

오늘날에도 2차 대전 당시의 탱크나 대포가 곳곳에 즐비하다. 탱크들은 예전에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ACE 상업센터 건너편의 메인로드에도 현존한다. 실제적인 전쟁은 끝났지만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관광객은 일본인들이 중심이며, 중국인들이 서서히 진출하고 있다. 독일·미국·일본·중국 대사관 등이 길목에 자리잡아 태평양의 패권을 누리는데 한국은 간혹 원양어선만이 들를 뿐이다. 우리가 먹는 참치가 이 해역에서 잡혀오는 것이다. 미크로네시아 폰페이는 머나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우리 식탁에서는 일상적으로 마주 대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소수자는 있기 마련이다. 콜로니카 시내에서 가장 큰 소수자 집단은 카핑카마랑지섬에서 온 사람들이다. 500여 명이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인종적으로 미크로네시안이 아니라 폴리네시안이다. 카핑카마랑지는 적도 북방 1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폰페이에서 415마일 떨어져 있는 오지 중의 오지인 대양의 섬이다.

그들의 이주는 1916년, 혹은 1918년 시작됐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가 성장을 멈추었고 자그마한 섬에서 90여 명이 죽었다. 인구를 보존하기 위해 90명의 사람들이 폰페이로 배를 타고 왔으며 목각 조각품 만드는 일과 하역 인부로 살아가고 있다. 투발루의 환경 재앙이 쟁점화되고 있지만, 산호섬의 절박한 생존 투쟁은 20세기 초반에도 있었다. 그만큼 산호섬은 야자수 우거진 낭만의 섬이 아니라 힘겨운 생존 투쟁의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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