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사닥다리로 불리는 마리아나제도… 최남단 괌에서 얽히고 히는 한·중·일과 스페인·미국
▣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초빙교수·해양문화재단 이사
기획연재 적도태평양 횡단기 마지막회 괌
우리가 속해 있는 북서태평양에는 사닥다리가 있다. 마리아나제도를 ‘태평양의 사닥다리’라 부르는 것이다. 마리아나제도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면서 가장 큰 섬이 괌이다. 괌 북쪽으로 로타, 티니언, 사이판 같은 10여 개의 섬들이 사닥다리처럼 줄지어 있다. 적도에서 불과 15도 올라간 위도상에 마리아나제도가 위치한다.
한반도의 ‘영어 난민’들 남하
마리아나제도는 기후, 해류, 군사, 교통 등 모든 면에서 사닥다리이다. 적도의 따스한 웜풀에서 형성된 태풍이 북상을 거듭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괌 정도에 이르면 상당히 세력이 강해져서 곧잘 피해를 입히곤 한다. 사닥다리를 타고서 올라서면 오키나와 군도를 관통하며 한반도 최남단의 이어도를 거쳐 제주도를 강타하고 한반도를 습격한다. 주력부대는 규슈 서해안을 거쳐 일본 열도로 진군한다. 제주도 남단에 이어도해양과학기지를 세우고 태풍 예보 시스템을 작동시킨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다.
웜풀에서 형성된 전형적인 난류인 쿠로시오해류, 일명 흑조는 필리핀과 마리아나제도 근역에서 북상해 대만 동부와 오키나와제도를 관통한다. 주류는 일본으로 흘러가고 곁가지가 제주도로 북상해 한반도 서해안은 물론이고 독도 근역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마리아나제도는 우리와 무관할 것 같지만 난류의 북상처로서 한반도 기후와 생물권 분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리아나제도는 군사적인 사닥다리이기도 하다. 괌 군사기지 북방에 오키나와 군사기지가 있으며, 오키나와 북방에 한반도의 군사기지가 있다. 괌에서 출격한 비행기들이 한반도나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말기에는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티니언 등이 모두 군사기지였다. 티니언에서 발진한 B29기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사실은 마리아나제도의 군사지리적 중요성을 정확히 말해준다.
마리아나제도는 교통의 사닥다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괌이나 사이판의 직항 노선이 오고 가며, 괌에서 미크로네시아나 필리핀, 하와이 등으로 연결되는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다. 말하자면 괌은 동부태평양의 하와이와 더불어 시내버스 같은 비행기들이 출발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한국에서는 직항 회수가 제한적이지만 일본에서는 수시로 비행기가 뜨고 있어 태평양과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지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사족을 붙인다면, 마리아나제도는 인구 이동의 사닥다리이기도 하다. 미국이 태평양 국가들에 제한적이나마 입국 허가를 자유롭게 해주자 미크로네시아, 사이판 등지에서 이주민이 몰려들고 있다. 좀더 여유가 있는 이들은 하와이로 향하고, 그렇지 않으면 괌으로 몰려든다. 그래서 미크로네시아에서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냄새 고약한(그네들에게는 아주 향기로운) 얌을 발효시킨 향토음식들이 준동하곤 한다. 우리가 김치·고추장을 들고 외국으로 떠났던 것과 같다. 그래서 괌은 다민족 사회 그 자체이다.
대개 적도 권역의 사람들은 북상하는 데 반해 유독 한반도에서는 마리아나제도로 남하하기도 한다. ‘영어 난민’들은 괌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라면 같은 생필품은 물론이고 한국산 배나 포도를 생짜로 들여다 팔고 있는 캘리포니아마트 같은 곳에 가면 자녀들을 데리고 영어유학을 떠나온 ‘기러기 엄마’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괌, 괌에서 하와이,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어지는 한반도 네트워크, 특히 기러기 엄마들의 행진이 그대로 엿보인다. 영어에 올인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 태평양에도 여진을 미치고 있다. 걸핏하면 터져나오는 가짜 박사 학위의 진원지 중에 괌이 빠지지 않는 것 또한 주목할 일이다.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원초적 발상도 괌에서 제주도, 제주도에서 평택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국방의 사닥다리가 중국을 에워싸고 이어지는 데서 비롯된다. 만약 이러한 사닥다리를 걷어찬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리라.
마젤란 함대여, 적반하장이여
괌 남단에 우마탁(Umatac)이란 해변이 있다. 말굽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좌우로 벼랑과 섬이 있어 한눈에 천혜의 항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의 눈으로 보면 큰 배가 들어설 수 없는 지형이지만 과거 갤리온을 타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썩 훌륭한 항구다. 그곳에 마젤란이 당도한 기념비가 서 있다. 수천km의 태평양을 가로질러,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미지의 섬에 당도한 한 사내를 기리는 기념비다. 그의 공과를 막론하고 그의 항해로 말미암아 지구는 둥글다는 진실, 인도로 가는 길은 태평양을 관통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실 등이 밝혀졌다. 그의 태평양 관통은 사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엄청난 비극과 인간 멸종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마젤란 함대가 남아메리카의 ‘마젤란해협’을 벗어나서 태평양을 거쳐 마리아나제도에 당도한 것이 1521년 3월6일로, 3개월 9일간의 항해였다. 마젤란 함대에 동승해 최후까지 기록을 남겼던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항해록은 당시의 생생한 소식들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해변을 떠나는 모습을 본 원주민들은 100여 척의 고깃배에 나눠타고 5km 넘게 우리를 따라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잡은 물고기를 보여주기도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뭔가를 손짓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가까이 접근하면 돌을 던지며 도망쳤다. 우리가 보기에, 이 사람들은 어떤 규율이나 질서도 없이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지배하는 세력도 없다. 그들은 벌거벗고 다니는데,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허리춤까지 닿는 경우도 흔히 보였다. 여자들은 아름다운데 남자들보다 훨씬 더 하얀 피부에다 몸매도 늘씬하다. 그녀들은 검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고, 보통 늘어뜨리고 다니는데 엉덩이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벌거벗고 다니는데, 다만 아래쪽의 은밀한 부위만 야자나무 껍질을 무두질해서 만든 작은 천연섬유 조각으로 가린다. 야자나무 껍질로 만든 조각은 종이처럼 부드럽고 구김도 간다. 여자들은 들에서 일하지 않고, 집에서 야자 잎으로 바구니나 광주리 등을 만들거나 집안 살림을 한다.”
이런 식의 마젤란 함대의 장황한 설명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실 우리가 간과하는 점은 대항해에 나선 유럽인들이 원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물과 식량을 얻어 재정비하고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에게 준 선물은 칼과 총을 이용한 살육이거나 십자가를 동원한 강제적 개종, 매독이나 홍역·천연두 같은 질병, 그리고 악담에 가까운 ‘미개인’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기록뿐이다. 마젤란 항해기는 “가난하지만 영리했으며, 도둑질에 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개의 섬을 ‘도둑의 섬’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원주민들이 함대에 접근해 무언가를 호기심에 집어갔기 때문인지, 괌과 사이판 등은 도둑섬으로 스페인에 알려졌다. 진실인즉,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땅에 들어와 십자가를 박고 자신들의 영토로 선포한 유럽인들 자신이 생도둑이었다. 일단 십자가만 박으면 모든 땅은 스페인 국왕과 여왕 폐하의 소유라고 선언했다.
아메리카의 은이 한국에 오기까지
이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는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에 이르고, 태평양을 다시 횡단해 마리아나제도를 거쳐 필리핀에 이르렀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우선권을 가지고 식민지 개척에 주력하고 있었다면, 포르투갈은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으로 진출한 상태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보 경쟁이 도를 넘게 되자, 교황의 중재로 동서로 갈라서 지배하게끔 결론이 난다. 스페인이 식민지 멕시코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까지 그 먼거리를 오가면서 식민지 경영에 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북마리아나제도는 멕시코와 필리핀을 오가는 갤리온 선단의 중간 기착지였다.
원주민 통치의 힘은 십자가와 칼에서 나왔다. 그런데 십자가와 칼 이상의 힘이 은에서 나왔으니, 은 본위 체제의 새로운 질서가 태평양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을 강제로 동원해 혹독한 조건에서 무수한 은광이 개발되고,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진 은괴들이 속속 멕시코로 집결했다. 갤리온에 실린 은들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향료 같은 값진 물건들과 교환됐다. 당시 필리핀에는 화교들이 진출해 집단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아랍 상인들이 수세기에 걸쳐 향료 장사꾼으로 섬마다 거주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은은 필리핀 등을 거쳐서 일본, 중국 등으로 흘러 들어간다. 한반도에서 인삼을 잔뜩 사들이고 있던 일본은 이로 인해 은을 다량으로 한반도에 보내야 했다. 오죽하면 일본 에도 정부에서 밀정을 보내어 한반도의 인삼 재배 기술을 획득하고자 했을까. 대마도 사람들은 인삼 중개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이래저래 아메리카의 은이 한반도까지 흘러 들어온 셈이다. 오늘날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은반지나 은팔찌, 은귀고리 따위의 장식거리에 남아메리카 인디오의 슬픈 추억이 묻어 있지나 않은지, 하는 생각도 든다. 자본의 파동이 수천km의 태평양을 건너서 동북아시아까지 요동치고 있었던 셈이다.
태평양 횡단의 끝에 느껴지는 진실된 공통점은 역시나 ‘미국의 그늘’이다. 아름다운 풍광 곳곳에 미국의 그늘이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괌은 하와이와 더불어 매우 일찍 미국령으로 넘어간다. 미국이 일으킨 바다의 파동이 전세계를 요동치게 했다.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뒤 평화조약을 체결해 승전의 대가로 획득한 전리품을 합법화한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필리핀과 괌, 대서양에서는 쿠바, 푸에르토리코, 서인도제도 등을 점령하게 된다. 스페인은 그 뒤 캐롤라인제도, 마리아나제도, 팔라우군도 등은 독일에 매각한다.
미국은 강력한 해양국가이다. 카리브해의 쿠바와 태평양의 필리핀, 괌의 지배는 미국 입장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른바 ‘명백한 운명론’이나 ‘거대한 정책’(Large Policy)으로 불리는 원대한 계획에서 구축됐다. 루스벨트 같은 이들은 ‘제국주의 야망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정책의 입안자들로서, ‘아시아 시장의 요지’인 필리핀 정복을 오랫동안 공들여왔다. 루스벨트는 1900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나는 언제나 서아프리카의 격언을 좋아한다. 부드럽게 애기하고 큰 채찍(Big Stick)을 갖고 다녀라. 그러면 너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큰 채찍’ 외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해군 전략가였던 머핸(A. Mahan)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태평양 건너쪽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원대한 관점’의 교훈을 제시한다. 미국 지도자들에게 ‘해도에 표시되지 않은 대양’으로 향해 ‘지상국’이 아닌 ‘해상국’이 될 것을 주문한다.
와이키키에서 중문까지 이어진 선
완벽한 미국령, 즉 북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태평양 후방기지가 된 괌은 하와이와 더불어 미국의 대아시아태평양 전략에서 결정적인 섬이 되었다. 괌에서도 미국은 ‘어머니 나라’(Mother Country)로 등장한다. 돌이켜보면 괌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 중의 하나였던 베트남전쟁의 전진기지였으며, 혹시나 중국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다시금 공군기지로 맡은 바 사명을 다할 것이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키신저가 써준 닉슨 독트린, 이른바 ‘괌 독트린’이라는 것을 거창하게 발표했다. 왜 하필 닉슨은 괌에서 이 문서를 읽었을까. 미국의 서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괌까지 진출했음을 상징한다. 국제법상 미국의 서쪽 끝은 하와이도 아니고 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을 대표하는 구질서가 사라지고 미국과 일본이란 신흥제국이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 든든한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주인’이 바뀌었을 뿐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들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륙 세력인 중국의 힘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어제의 적이었던 해양제국 미국과 일본이 연대해 방어진을 치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하와이 와이키키에서 괌, 제주도 중문에 이르기까지 비슷비슷한 형식의 다국적 관광촌이 형성돼 있다.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의 하나이다.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 이들 노선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전혀 새로운 국면이 나타날 것이다. 태평양 횡단의 그늘에 이같은 비밀 부호가 숨어 있는 셈이다.
*이번호를 끝으로 적도태평양 횡단기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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