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우에 스며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속으로 끌려와 버려지고 살해당한 한인들
▣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초빙교수·해양문화재단 이사
기획연재 적도태평양 횡단기⑤ 팔라우
근엄하게 흰색 정복을 차려입고 칼을 쥔 선생님들이 가운데 앉아 있다. 앞뒤로는 원주민 소년소녀들이 도열해 있는데 겉옷에 가타카나로 이름을 적었다. 죄수복에 이름을 명기하듯 옷에 일본 이름이 적힌 원주민 아이들의 모습이 자못 경건하다. 1930년대에 찍힌 이 사진 첫 번째 줄의 어깨가 드러난 소년이 훗날 팔라우의 대통령이 되는 엣피슨(Epison)이다. 이 사진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일본이 교육한 엣피슨 대통령
군국주의 교육과 신생국가의 대통령. 그렇다. 식민 잔재는 일본군 장교 박정희의 신화가 여전히 통하는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군대가 팔라우를 떠났지만 일본의 입김은 지금도 강력하다. 이 나라를 지배해온 그룹은 당연히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사람들이고, 오늘날은 미국식 교육이 대체하고 있다. 한반도를 포함한 태평양의 일반적 현실이다.
일본 해군은 머리가 좋은 원주민 청년을 뽑아서 해군으로 차출했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일본 배에 태워져 다른 식민제국으로 옮겨 훈련을 받게 했다. 그때 배운 소년 중에 엣피슨 같은 인물이 있으니 그는 마카사르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선원 교육을 받고 일본 해군의 메커니즘을 배운다. 1944년, 19살에 그는 일본 전함 아키타마루를 타고 팔라우에 돌아온다. 항해 도중 미군 함정의 공격을 받아 앙가우르섬 서쪽 5마일에서 배에 불이 붙었다. 팔라우 사람 17명이 타고 있었는데, 15명이 실종되고 두 사람만 헤엄쳐서 앙가우르에 도착했다. 엣피슨은 후에 팔라우의 뛰어난 사업가로 변신하고, 일본식 관광을 받아들여 최초의 짜임새 있는 관광사업을 시작한다. 그 힘으로 대통령까지 된다.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당시인 1989년, 그는 2차 대전에 참가했던 노병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던진다.
“미국과 일본의 차이를 말한다면! 일본은 우리를 노예처럼 부렸으나, 우리가 어떻게 일하고 자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돈을 보냈고 통조림 음식도 보냈으나, 사람들을 게으르고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노예와 교육, 돈과 식량. 재미있는 대비이다. 모터보트로 30여 분 달렸을까. 원시공동체 집회소인 바이를 본뜬 거대한 수상가옥 건물을 만났다. 고래센터다. 모든 길은 나무 판때기로 연결된다.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고래들은 용케 알고 따라다닌다. 조련사들은 영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쓰고 있었는데 일본어를 구사하는 소녀의 지시를 고래들은 용케 알아듣고 반응한다. 일본어로 말을 하고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쌓는다. 한국어로는? 물론 알아듣지 못한다. 태평양에서는 돌고래조차 일본어에 익숙하다.
직항로가 뜨면서 제법 한국 관광객들이 팔라우로 몰려들고 있다. 팔라우에서도 ‘천상의 바다정원’으로 소개되는 록아일랜드로 보트를 타고 나가서 무인도 버진블루 홀에 배를 댄다. 록아일랜드는 1783년 서양인에게 알려지기 전까지 금단의 섬이었다. 바다로 나간다. 점심에 먹던 닭고기뼈를 던지자 엄청난 고기들이 몰려든다. 물 반 고기 반이다. 산호섬답게 산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용궁’이 본디 이런 풍경을 상징하는 것인가 느껴진다. 이 아름다운 용궁도 아비규환의 살육터였다.
1944년 8월의 강력한 공중폭격에 이어 미군이 펠렐리우에 상륙한다. 섬 중앙의 석회암 동굴에서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저항한다. 미군은 처음에는 불과 이틀 정도면 전투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오산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무려 두 달 보름여에 걸친 무모한 전투는 1800명의 미군, 1만 명의 일본군이 죽고서야 끝났다. 5명의 일본군이 동굴에서 1년 뒤에 기어나오기도 했다.
주민들은 ‘식민지 근대’를 원했을까
환초로 둘러싸인 앙가우르에 가면 독일과 일본이 개발한 인광석 탄광이 있는데 지금은 새들과 악어들의 집이다. 거기에도 F-4 전투기와 B-29 폭격기 잔해가 있다. 미군 군함 몇 척도 일본군에 격추됐다. 대부분 지역에서 다이버와 미국 침몰선 전문가들은 재미 반, 사업 반으로 ‘보물선’을 찾아다닌다. 팔라우 사람들은 ‘전쟁의 추억’을 찾아내고 이를 다이버들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내놓아 먹고살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객도 전쟁의 추억을 재미 삼아 낚을 뿐이다. 팔라우 어디에도 슬픈 죽음의 그림자는 없다.
1922년에 일본의 남양정부(Civilian South Seas Government)가 성립되고 팔라우의 수도인 코로르가 그 중심지 구실을 맡았다. 이 지역은 육해공군을 관장하는 팔라우 집단사령부와 식민청인 남양청의 본청, 법원, 병원 등이 있던 매우 중요한 전략적 기지였다. 팔라우는 1994년에 독립했으나 2044년까지 재정난 때문에 미국과의 협약에 묶여 있다. 2만여 인구의 80%가 수도 코로르에 살며, 7천여 명이 외국에 나가 산다. 미국 달러를 쓰며 주 수입원은 미국과 계약된 돈, 그리고 관광과 무역이다. 350여 개의 섬이 있고 12개 섬에만 주민이 산다.
북태평양의 20세기 근대사는 곧바로 남양군도의 역사이고, 남양군도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 이민이 급증했으며, 1937년에 설탕산업이 처음으로 시작된다. 팔라우 국립박물관에 수집된 사진들엔 번화했던 거리 풍경이 엿보인다. 이 머나먼 섬에 인력거와 자전거가 등장하고, 일본식 간판이 들어서고, 중절모를 쓴 일본인들이 오가는 그런 풍경이다. 개인 기업의 진출만으로는 식민지 이윤을 극대화할 수 없자 남양척식회사가 들어선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곳곳에 팔라우 정부 청사들이 들어서 있다. 대통령궁이 있는 곳에 중앙통이 발전해 있다. 일본이 넓힌 도로들인데, 차량 소통이 활발하다. 대로변에는 각종 관공서와 선물가게들이 즐비하다. 건물들은 바뀌었으나 일제시대에 마련된 도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이민자들은 전력산업, 알루미늄 광산, 진주 양식 같은 일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 1935년까지 5만여 일본인들이 섬에 흩어져 살았다. 1940년에 일본 이민자는 7만7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2년 뒤에는 9만6천여 명을 헤아렸다. 미국과 전쟁이 터지면서 군인·군속 등이 속속 집결해 인구는 거의 2배로 불었다.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도로가 포장되고 전기·수도·하수시설, 상가들이 들어선다.
이러한 인프라를 ‘식민지 근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주민들이 이러한 것을 원했을까. 아름답고 평화로울뿐더러 해양자원이 무진장으로 흩어진, 그야말로 낙토에 살던 이들에게 이방인들이 문명 개화란 이름으로 강요한 ‘근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식량 훔치다가 죽어간 사람들
둘째, 일제가 투자한 이유는 위임통치를 하는 대가로 국제연맹의 규정을 따라야 했기 대문이다. 국제연맹은 위임통치국에 학교·병원시설 등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했다. 병원은 일본인 전용 병원과 팔라우인의 병원이 분리 운영됐다. 일본이 빼앗아간 물적·인적 약탈의 총량까지 계산한다면 ‘식민지 근대’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일본은 항구적인 수탈을 위해 농업·어업·광업을 위한 연구센터를 만들었다. 바닷새 똥으로 운영되는 인광, 코코야자를 말린 코프라, 지방의 파인애플 농장 같은 플랜테이션이 번성하고, 벼 재배법이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한국·중국·일본 노무자들을 불러들인다.
일본식민청은 이른바 토지개혁이라는 것을 섬마다 실시했다. 한반도에서 1910년대에 하던 방식과 똑같은 것이었으니 원주민의 개인 토지는 인정하되, 바닷가나 산의 공유지는 모두 식민청 소유로 돌렸다. 한마디로 ‘털도 벗기지 않고’ 대부분의 땅을 먹어치웠다. 전쟁이 벌어지자 그 땅은 방어를 위한 군사기지로 징발된다.
일제 통치 기간에 팔라우인에게 제한적인 교육이 행해지고 일본인 학교가 속속 들어섰다. 1926년에는 코로르에 목공학교가 개설됐다. 나무를 베어내고 가공하기 위해서였다. 고급 기술의 습득이나 식민 관료는 허락되지 않았고 오로지 나무나 베고 다듬는 일이 주어졌다. 교육이 일본어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팔라우의 노인들 중에는 아직도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그리고 최소한의 기회. 그것이 식민 교육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탤런트 이승연이 군위안부를 주제로 한 누드 사진을 찍었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른 끝에 사진들을 불태운 적이 있다. 그와와 기획사는 할머니들의 한이 맺힌 팔라우에서 그 정신 나간 연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집단 이주는 언제부터일까. 연구에 의하면, 1936년에 15살의 어린 나이로 군위안부 10여 명이 처음으로 팔라우에 끌려온다. 그 뒤 코로르섬 토목공사를 위해 경상도·전라도에서 노무자 200여 명이 온다. 코로르시 동쪽 끝에 위치한 아이고브리지는 한인들이 다리를 놓으면서 혹독하게 시달린 탓에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원주민들이 ‘아이고다리’라 작명했다.
한인 노무자와 더불어 조선총독부는 농업이민도 보낸다. 총 13회에 걸쳐 1266명이 들어온다. 중부태평양의 중심기지인 축이 궤멸되자 1944년 2월25일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선발된 정예의 현역부대인 29사단이 팔라우로 온다. 중국 관동에서 1만2천여 명이 오는데 대부분 한인 병사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팔라우의 한인들은 대부분 군속이었다. 말이 군속이지 해군에서 토목작업을 시키기 위해 끌고 온 노무자였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와 남양의 수송 관계 노동을 했다. 미군 공습이 심해지자 진지 구축에 투입된다. 무인도에서는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갈매기 똥인 인광을 채굴해 비료를 만드는 데 한인들이 투입됐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중부태평양의 마지막 전쟁터인 팔라우로 들이친다. 미 제1전대가 공격해 일본 육군 7212명 가운데 6766명이 전사하고 466명만 생존한다. 해군도 3400명 중에서 단지 10명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그 일본군 안에는 징병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군 폭격이 거칠어지자 일제는 팔라우의 일반 일본인 1만7800여 명을 본국으로 강제 소환한다. 그렇지만 강제 징용된 한인들은 송환 대상에서 제외된 채 오도 가도 못할 처지에 놓인다. 식량이 줄어들자 한인들에게는 식량도 주지 않았다. 식량을 훔치다가 총을 맞고 숱한 한인들이 죽어나간다. 군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도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창고에서 건빵을 훔치려다 걸린 한인을 나무에 매달고 귀를 베거나 코를 아래서 위로 깎았다는 믿지 못할 증언도 전해진다.
다시 모여든 팔라우의 한·중·일
팔라우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 항복문서를 공식 조인한 시점은 1945년 9월2일. 총알받이로 끌고 와서 정작 자신들만 빠져나가고 한인들은 나 몰라라 팽개쳤다. 간신히 남양군도에서 귀환한 한인이 2만5773명, 팔라우에서만 3천여 명이 귀환했다. 사실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갔으리라. 끌고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팽개치는 악행을 저질렀으며, 군위안부로 동원한 소녀들을 막판에 동굴 등에서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아름다운 태평양은 이렇듯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일본의 흔적은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팔라우의 위아래 섬을 연결하는 KB(코로르-바벨다옵) 다리가 그만 1996년에 붕괴한다. 일본 정부는 선뜻 돈을 내놓는다. 5년여의 공사 끝에 멋진 현수교가 ‘일본-팔라우 친선교’로 명명되어 2001년에 기부된다. 무려 1350피트에 달하는 다리 위에서 두 섬 사이를 거세게 흘러가는 태평양의 물줄기를 굽어보며 식민의 흔적을 ‘원조’란 형식으로 되살리고 있음을 느낀다.
이곳에서 ‘스시’ 간판이나 ‘벤또’ 같은 표현을 자주 마주친다. 팔라우에서는 런치박스보다 벤또란 말이 지금껏 쓰이고 있다. 중국말도 흔하게 눈에 띈다. 관광객 없이는 먹고살기 힘든 이 나라에 일본뿐 아니라 중국 자본도 많이 들어와 있다. 타이베이 자본이 호텔을 짓고 가게도 열었다. 일본과 중국 단체관광객 그리고 한국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의 텃밭에 한·중·일이 또다시 모여살고 있으니 머나먼 태평양에 동북아 패권전쟁이 옮겨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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