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낭만에 갇혀 있는 우리 안의 하와이… 죽어간 원주민들과 ‘문명의 그늘’을 보라
▣ 글·사진 주강현 제주도 초빙교수·해양문화재단 이사
기획연재-적도태평양 횡단기① 하와이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원주민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의 태곳적 무덤이던 대지들에 풀밭과 쇼핑몰이 자동차 주차장과 더불어 세워졌다. 그 땅들은 대부분 타로가 재배되던 땅이며, 우리들 수백만 명을 수천 년간 먹여살려온 곳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견고하게 세워진 물고기잡이 연못들이 즐비한 커다란 만들은 지금은 조각조각이 나서 분절된 채로 제트스키와 윈드서프, 요트 등으로 그득 찼다. 연간 6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을 담아내는 초고층 호텔들이 태양이 빛나는 아름다운(쉽게 말해 오염된) 해안으로, 지방을 가로질러 속속 건설되고 있다. 중요한 섬들인 하와이와 마우이, 오아후, 카우아이에서는 군사비행장과 훈련캠프, 무기저장고, 게다가 특권적인 집들이 원주민의 본디 소유지에 들어섰다. 하와이란 또 하나의 외국, 그 식민지 나라를 이름하여 아메리카합중국이라고 부른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전쟁기념관
머나먼 장정을 떠나기 직전, 와이키키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형서점에 들렀다. 자그마한 책을 샀다. 란 다소 비장한 제목이 달려 있다. 저자 하후나이 캐이 박사는 섬뜩한 어조로 위와 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과도 같은 그 어떤 ‘태평양의 묵시록’이라고나 할까.
하와이와 괌은 당연히 미국 영토이다. 서부개척의 최대치가 하와이까지 뻗어나갔다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도약이 ‘미국령’ 괌에서 성취된 것이다. 전선은 괌을 넘어 오키나와, 그리고 한반도까지 미친다. 한반도에서 미국까지 비행기만 타고 가는 식으로는 태평양이 보이지 않는다. 육지 중심이 아닌 해양 중심의 사고가 아니면 ‘해양제국 아메리카합중국’을 읽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두말할 것 없이 군사기지이다.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을 강조하고 죽어간 이들을 전쟁영웅으로 기리는 기념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배까지 무료로 태워서 가라앉은 전함 아리조나 위에 세워진 추모관에 데려다준다. 돈이 중요한 사회에서 무료 입장과 무료 승선은 이색적인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이국적’이다. 전몰자에게 정중한 예의를 갖춤은 당연지사지만, 그렇게 해서 하와이를 찾는 대개의 관광객은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오히려 전쟁을 사랑하게끔 교육받게 된다. 30분짜리 태평양전쟁 다큐멘터리까지 무료이며, 관람 순서상 ‘의무’이기도 하다.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무료, 왠지 불순물이 섞인 느낌이다.
하후나이 캐이 박사의 책을 덮으면서 잠시 100년 전을 떠올렸다. 광무 6년, 그러니까 1902년 12월22일의 일이었다. 제물포 개항 이래로 외국 나들이가 적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장안의 화제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제물포에서 미국령 하와이로 이민배를 탄 것이다. 1905년 후반에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7226명이 이민을 떠났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한국민들에게 ‘미국 이민=하와이 이민’이란 등식을 각인시켜주었다. 그래서일까. 보편적 한국인들은 “태평양의 섬?” 하고 질문을 던지면 대개 하와이를 꼽는다. 보편적 한국인들의 하와이에 대한 일반 상식은 대략 이럴 것이다.
천신만고 끝의 하와이에 당도, 파인애플이나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비참한 노동, 끝내는 성공한 민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운동,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민족 지도자, 그리고 하와이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한국인 찬송가와 풍금 소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와 태평양을 잇는 하와이 신화의 불꽃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이제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민사박물관이 인천항 월미도에 마련됨으로써 이 모든 지난한 역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제임스 쿡이 가져온 선물, 질병
온갖 고생을 하며 근검절약해 일정한 성공을 이뤘고, 조국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진정성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문제는 우리의 21세기 하와이 이해 방식이 아직도 ‘독립운동의 거점’이나 ‘야자수 우거진 태평양의 낙원’, 혹은 ‘와이키키 해변의 낭만’과 ‘진주만과 가미카제’에 그친다는 점이다.
이민 직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893년 설탕 자본가들에 의해 독립적인 카메하메하 왕조를 대신해 하와이공화국이 설립된다. 곧바로 이름뿐인 공화정을 쓰러뜨리고 1898년 미합중국에 병합된다. 불과 5년여 뒤에 한국인들이 당도한다. 본디 원주민 사회는 공동소유에 입각한 공동체적 사회였다. 백인들에 의해 토지는 분점되고, 대단위 농장이 만들어졌으며, 이민 노동력이 투입됐다. 우리는 하와이 독립운동사를 강조하면서도 어떤 구석에서도 하와이 원주민들의 빼앗긴 역사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의 빼앗긴 역사는 분노할 만하지만 원주민의 식민화는 당연한 것일까.
한국인들이 하와이 무단합병을 무시하고 기독교식 문명 개화의 사회진화론적 속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한, 태평양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놀룰루의 랜드마크 건물인 알로하타워에 올라가 100여 년 전 이민선이 들어오던 항구를 바라보면서 내내 젖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7번 부두 옆의 하와이해양박물관에 들른다. 하와이를 처음으로 유럽에 알린 제임스 쿡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첫 발견, 첫 발명, 첫 경험 따위의 ‘첫 번째’에 주눅들거나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쿡에게 경의를 표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와이 땅은 본디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으니 ‘발견’ 따위는 사치스런 표현이다. 그렇다면 2천여 년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발견당한’ 것인가.
태평양사에서 선사시대란 고고학적 시간 이전에 서구인과 접촉이 이루어지기 전의 역사를 가르키는 경우가 많다. 서구인과 접촉함으로써 유럽문자로 기록에 담겨지면서 비로소 역사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이전의 구전역사나 팔라우의 그림판 같은 기록은 아예 무시된다. 천만다행으로 비솝박물관운 원주민의 역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폴리네시안의 위대한 대항해는 기원전 1500여 년에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산과 전파 중 하나이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는 그 자체로 위대한 서사시였다. 2중 카누를 타고서 미지의 바다를 향해 북서쪽으로 향했다. 바람을 타고서, 혹은 침묵의 바다인 적도의 무풍대를 거치면서, 때로는 거친 바다와 폭풍우를 용감하게 헤쳐나가며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지속시켜나갔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군도들에 도착했을 때, 하와이의 새로운 역사가 열렸다. 바이킹이 유럽에서 해양 대이동을 시작하기 1천여 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15세기에 이르면, 인구가 거의 40만 명에 이르며 사회 자체가 복잡하게 진화한다. 평화로운 발전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족장들이 번성했으며 주도권을 잡기 위한 무자비한 전쟁이 잇따랐다. 드디어 1795년 카메하메하왕이 모든 섬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던 독립왕국에 제임스 쿡이 들어온다. 원주민은 서구인들이 처음 방문했을 때, 진심으로 환영했던 것 같다. 쿡 일행은 ‘문명의 선물’을 가져온다. 질병이란 선물은 핵폭탄처럼 원주민 사회를 공격한다. 여자들도 병으로 죽어갔다. 선원들에게서 전염된 치유 불가능한 전염병들이 하와이 인구의 감소를 가져온다. 1820~40년 태평양 고래잡이의 번성으로 고래 사냥꾼들이 밀어닥치자 인구가 급감한다. 인플루엔자, 천연두,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독감 등이 만연된다. 19세기 후반부터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와이키키는 미국의 환락가로 둔갑
20세기 접어들어 더 치명적인 질병이 만연한다. 원주민들이 ‘중국병’이라고 부른 병이었는데 백인들은 이를 한센병으로 간주했다. 몰로카이섬에 격리수용 지구가 만들어지고 환자들은 강제로 수용된다. 1969년에 격리정책이 종료될 때까지 많은 이들이 불법에 내동댕이쳐진 채 살아가야 했다. 성자 후보에 오른 벨기에인 다미엔(1840~89) 신부는 추방당한 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한반도의 소록도 강제격리 정책은 하와이의 복사판이다.
주청사 마당에 서 있는 다미엔 동상 앞에서 다시 한 번 질병의 사회사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필자가 20여 일 뒤에 방문한 폰페이 같은 섬에서도 섬 인구의 70% 이상이 서구인 접촉 이후에 죽어갔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이 문명과 개화를 부르짖으면서 원주민의 신앙을 악마와 악령으로 꾸짖었지만, 정작 그네들 문명이 악마와 악령이었던 셈이다.
유람선도, 관광버스도, 온갖 팸플릿도 훌라춤과 야자수 늘어진 와이키키 해변 일색이다. 하와이 최대의 상징물은 당연히 훌라춤과 와이키키이다. 우리에게 훌라춤은 이국인만 만나면 무조건 꽃을 걸어주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상투적인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서구와 첫 접촉을 시작하던 당시의 훌라(Hula)는 구전문학이었다. 역사, 즐거움과 경외스러움, 노래, 기도, 한탄, 신에 대한 찬미, 남자와 여자 등등에 관한 모든 것의 종합이었다. 훌라는 원주민 사회의 통합적인 기제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각각의 통과 제의에 걸맞은 훌라가 존재했으며, 춤꾼은 공동체 소속으로서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
그러나 차츰 변질되기 시작해 접대용으로 전락한다. 주로 여성들이 교태스럽게 관광객을 위해 추어대는 춤으로 완성돼나간다. 이미 193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일이다. 선교사들은 아예 춤을 금지한다. 섬에 팽배한 ‘방종’을 뿌리 뽑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한다. 정부와 경찰, 선교사들은 어떤 특별한 모임에서도 훌라를 금했다. 그토록 금지했던 훌라가 왜 하와이의 대명사로 되살아난 것일까. 굳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와이키키 신화 또한 허황된 것이다. 미국령이 되면서 하와이는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더욱이 군사기지로 변하면서 해군이 몰려들고, 기지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20세기 초반부터 와이키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환락가로 둔갑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면 으레 와이키키에서 한 번쯤 염문을 퍼뜨리거나 파도타기 앞에서 수영복 사진을 찍게 된다. 와이키키의 변형이 괌이며, 괌의 또 다른 변형이 제주도 중문단지라고 한다면 정확할 것이다. 원주민과 분리된, 원주민의 삶과 전혀 무관한 관광단지가 조성돼 100여 년의 역사를 이끌어온 셈이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한국에서도 쉴 새 없이 신혼부부를 비롯한 선남선녀들이 하와이를 찾는다. 그러나 와이키키 해변에서 조금만 떨어진 갓길로 나가면 수많은 노숙자들과 마주친다. 하와이의 격월간 2007년 9·10월호에 ‘집보다 홈리스가 더 좋을 때’라는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미크로네시아와 마셜군도 등에서 하와이로 날아온 사람 수가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미국 입국이 자유로운 나라들인 미크로네시아와 마셜인 다섯 중의 한 명은 거적 따위를 깔고 하와이에서 살아간다. 2001년 하와이 전체 노숙인 3643명 중 미크로네시아와 마셜인은 286명으로 7.9%였다. 불과 5년 뒤인 2006년엔 전체 노숙인 3198 명 중 미크로네시아와 마셜인이 736명으로 무려 23.1%나 차지했다.
미크로네시아·마셜군도에서 날아온 노숙인들
그네들은 왜 하와이로 와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즉 자신들의 섬보다 훨씬 나은 조건의 하와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상급학교로 진학해 좋은 직업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될 기대감에 노숙자로 살고 있다. 학교와 직업의 기회 같은 문명사회의 기대치와 노숙자의 삶, 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가 오늘의 호놀룰루 풍경이다. 쾌적한 기후에 뛰어난 자연경관, 사시사철 온갖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는,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의 하나인 하와이에 펼쳐지는 이런 ‘문명의 그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명 개화인에 의해 야만적 원시인이 ‘사회진화론’의 잣대로 훈육되던 태평양에서 ‘문명의 그늘’이란 후과를 읽어나감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문명과 야만이란 것에 관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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