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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7년 부작위, 임신중지한 여성을 죄인으로

헌재 ‘낙태죄’ 위헌 결정 뒤, 입법·행정 공백이 낳은 비극
등록 2026-03-05 22:04 수정 2026-03-06 21:28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가 2026년 3월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신 34~36주차에 임신중지를 한 일로 살인죄로 기소된 권아무개씨의 무죄 선고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가 2026년 3월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신 34~36주차에 임신중지를 한 일로 살인죄로 기소된 권아무개씨의 무죄 선고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임신 34~36주에 임신중지를 한 일로 검찰이 살인죄로 기소한 20대 여성에게 법원이 무죄가 아닌 유죄를 선고했다. 사실 이 여성은 사회의 보호·지원 체계가 제대로 갖춰졌다면 법정에 설 필요가 없었다. 책임을 물어야 할 ‘진짜 피고인’은 따로 있다.

뉴질랜드는 2021년 임신중지 임상지침(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의료인에게 배포했다. 모두에게 같은 품질의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뉴질랜드 보건부가 만들었다. 의료인이 임신중지 시술 전에 할 일과 임신부에게 제공해야 할 정보, 임신 주수별 임신중지 방법과 임신중지 후 관리에 필요한 사항 등을 안내하는 문서다.

여기엔 ‘임신 20주 이후’에 시행하는 임신중지 시술 방법과 그 외 필요한 의료 조치 내용도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보면 임신 20주 이후를 20~23주, 24~25주, 25~28주, 28주 이후와 같이 나눠 시기마다 유산유도제를 분만 때까지 얼만큼, 얼마의 간격으로 투여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이런 내과적 임신중지를 할 수 없을 때 제왕절개수술을 고려하도록 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7년 됐지만…

반면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복지부동이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들임에도,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심판 대상 법의 한시적 효력 인정)을 하면서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임신중지권을 보장하는 일에 무관심하다. 법률 제·개정 없이도 가능한 임신중지 임상지침 마련과 유산유도제(미페프리스톤) 도입마저 손을 놓고 있다. 식약처는 2021년 7월~2023년 8월 총 4곳의 법무법인으로부터 6건의 법률 자문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4건이 현행법 개정 없이도 유산유도제 품목 허가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처럼 국가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부러 안 함)가 초래한 사회안전망 부재 속에서 2024년 6월25일 임신 34~36주 시기에 임신중지를 한 권아무개(27)씨는 그해 7월12일 그를 ‘살인죄’로 “엄벌”해달라는 복지부의 수사 의뢰로 시작된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가 됐다. 권씨는 2025년 7월23일 살인죄로 기소됐고, 검사는 2026년 1월26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권씨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공권력이 가해자인 이 사건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며, 권씨에게 ‘살아서 태어난 아이를 살해할 의도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형사사건으로 좁혀지고 말았다.

권씨는 임신중지를 목적으로 산부인과 병원장 윤아무개(81)씨에게 임신중절수술을 의뢰한 것은 맞지만 살아서 태어난 아이를 살해할 목적이 없었고, 수술 당시 전신마취의 영향으로 아이가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사산아의 출산으로 알고 있던 권씨는 제왕절개수술을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사항을 안내받은 적이 없다고도 밝혔다. 살아서 태어난 아이가 사망하는 상황을 인식하거나 예상한 적이 없다는 취지다.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태어날 자녀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뿐, 그 누구도 출산 후 살인을 의도하지 않는다.”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가 법원에 제출한 탄원서 내용 중 일부다. 모임넷은 2월26일 권씨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127개 단체와 4792명이 탄원서에 연명했다.

“한 여성의 문제 아닌 국가와 사회가 방치한 결과”

그러나 이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이진관)는 3월4일 제320호 법정에서 권씨의 살인죄가 인정된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권씨가 임신중지 당시 임신 34~36주차 산모로서 자연분만 시기(임신 37주 이후)에 이르게 된 상황이었고, 특별히 건강상의 문제가 없던 태아가 출생 뒤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있었다고 봤다. 또한 병원장 윤씨로부터 태아가 사산된다는 취지의 설명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임신중지를 위한 수술 감행은 태아가 사산되지 않는 이상 모체 밖으로 살아서 나온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권씨가 예상할 수 있었다고도 봤다. 어떤 행위로 인해 범죄에 해당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 즉 ‘미필적 고의’가 권씨에게 있었다는 것이 재판부의 결론이다.

재판부는 헌재의 결정으로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잃은 형법상 ‘낙태죄’에서의 ‘낙태’는 자연분만 시기 전에 인위적으로 태아를 모체 밖으로 배출하거나 모체 안에서 살해하는 행위이므로,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에 출생한 태아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는 살인이지 ‘낙태’가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헌재의 결정 이후에도 별다른 입법 조치가 없어서 생긴 공백 때문에 초래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권씨가) 더 이른 시기에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출산 후 양육을 하기에도 어려운 고립된 상황에서 결국 임신 후기가 다 돼서야 더 큰 비용과 법적·의료적 위험을 감당하고 임신중지를 하게 된 건 시대가 남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도 “이 사건의 본질은 한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헌재 결정 이후) 지난 7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국가, 그리고 이를 방치해온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라며 “국가의 부작위, 전문가 집단의 책임 회피, 그리고 이를 외면해온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개인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고 말했다.

유죄 선고했지만 재판부도 “입법·행정 공백” 인정

이진관 부장판사는 이 같은 입법과 행정 공백을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아닌 양형 참작 요소로만 채택했다.

“20대 여성인 권씨가 (임신중지 무렵)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여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점, 오랜 기간 가족과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는 등 별다른 사회적 유대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과거에 임신·출산 경험이 없는 점, 권씨가 2024년 3월경 내원한 산부인과의원에서 (생리를 길게 멈춘) 그의 임신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낭성난소증후군(호르몬 불균형으로 생리불순, 배란장애 등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진단해 권씨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 권씨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초기에 인지하고 전문가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임신 유지 여부를) 숙고했더라면, 그리고 국가가 임신·출산·육아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이 사건과 다른 결과가 초래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진관 부장판사는 권씨에게 다음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이 사건 범행은 엄히 처벌해도 마땅하지만, 위기 임산부에 대한 사회적·구조적·법적인 보호장치가 아직 부족하다고 보여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그 보호장치를 안 만든 게 국가다. ‘진짜 피고인’은 따로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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