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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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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으로 ‘방화벽’ 깨기, 독일 극우정치의 강한 기시감

근본주의 경계심 눅이며 엘리트 정치 반감 극대화… 한국의 주류·진보, 신뢰받는 대의명분 정치 절실
등록 2026-09-10 22:38수정 2026-09-13 08:16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026년 9월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진입해 선거 관련 용품이 보관된 곳을 살펴본 뒤 시민들에게 내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026년 9월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진입해 선거 관련 용품이 보관된 곳을 살펴본 뒤 시민들에게 내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정치에 ‘방화벽’(Brandmauer)이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 극우정당은 상대 자체를 해주지 말자고 하는 정치적 원칙이다. 나치를 겪어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프랑스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극우 인사인 장마리 르펜이 2002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 진출했을 때, 극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파가 우파정당의 당시 현직 대통령 자크 시라크를 지지한 게 대표적이다. 이런 예를 따라 한국도 방화벽 같은 방식으로 극우정치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합리적 시각이다.

문제는 독일에서부터 이 방화벽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에서 44% 득표율을 기록하며 단독 과반에 겨우 3석 모자란 39석을 얻어 1당을 차지했다. 이 글을 적는 시점에선 3석 확보가 쉽지 않아 아직은 방화벽이 간신히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방화벽에 동참하는 것보다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이 사안별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만일 AfD가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한다면 독일에서 전후 최초로 주정부를 장악한 극우정당이 된다.

 

전후 최초 독일 주정부 장악한 극우정당

 

방화벽이 무너진 것은 극우정치를 지지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기성정치도 타협을 택하게 되고, 일부 좌파정당도 이들의 지지층에 어필하기 위해 이들의 어젠다 일부를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극우정당이 사회적 시민권을 사실상 획득한 것이다. 독일만이 아니다. 프랑스도 심상찮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에서도 극우정치는 집권을 이미 해봤거나 집권을 노리는 주요 정치세력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일단 극우정치가 포퓰리즘과 결합하면서 생긴 변화를 다시 한번 짚지 않으면 안 된다. 극우정치는 특정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사회적 자원을 독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급진적이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다. 이 정치는 결과적으로 혹은 노골적 의도에 따라 가진 자에게 유리한 효과를 내게 된다. 과거 유럽의 극우주의자들은 이를 근본주의적 태도로 관철하려 했다. 장마리 르펜이 예사로 했던, 거침없는 인종차별 등 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포퓰리즘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중도적(?)으로 변화했다.

포퓰리즘은 사회를 순수한 대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대립으로 보는 정치적 관점인데, 독자적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 다양한 관점과 결합한다. 가령 극우정치와 결합하면 극우포퓰리즘이 되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는 늘 자신이 순수한 대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므로 대중의 지지를 쉽게 획득한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극우정치 지지를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근본주의자가 돼야 하기 때문인데, 포퓰리즘이 극우정치와 결합한 이후에는 극우를 지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극우정치가 포퓰리즘적으로 구성하는 기득권에 반대나 항의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극우주의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조사해보면 AfD를 지지하는 유권자 상당수는 AfD가 극우라기보다는 중도적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극우정치가 기득권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극우정치는 앞서 본 것처럼 특정한 계층이나 민족을 호출하고 결과적으로는 가진 자의 이익을 보장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극우정치는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민주’는 극우정치의 약점이다. 그런데 극우정치는 포퓰리즘적 어법으로 이 약점을 극복한다. 자신들이 아니라 엘리트 주류 기득권이 반민주적 독재를 일삼고, 자신들은 이에 저항하므로 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대중친화적 성격이 민주주의와 서사적으로 통한다는 점을 활용하는 셈이다.

 

2026년 9월7일 독일 베를린 주선거를 앞두고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반대하는 시위의 하나로,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우스 파크’의 캐릭터 에릭 카트먼이 등장하는 풍자적인 포스터가 가로등 기둥에 걸려 있다. REUTERS

2026년 9월7일 독일 베를린 주선거를 앞두고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반대하는 시위의 하나로,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우스 파크’의 캐릭터 에릭 카트먼이 등장하는 풍자적인 포스터가 가로등 기둥에 걸려 있다. REUTERS


개소리도 잘 먹히기만 한다

 

AfD의 구체적 주장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들은 방화벽 자체를 반민주적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극우적 주장도 민주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정당한 의견이므로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막는 것은 부패한 기득권의 횡포이자 독재라는 것이다. 이들은 코로나19 방역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 정책에 대해서도 독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부가 주도하는 방역 정책을 아돌프 히틀러가 합법적 절차를 가장해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추진한 수권법에 비유했다. 오히려 이들이 평소 보여주는 정치관이야말로 나치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는 황당한 주장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구도를 수용했다.

극우정치가 이런 담론을 조성해 관철하려 한 것은 이민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이거나 박탈하는 것인데, 이쪽으로 논리를 이어가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이들은 포퓰리즘적 접근법을 활용했는데, 기득권이 새로운 지지층을 창출하기 위해 개방적 이민정책을 취한다는 서사를 동원한 게 대표적이다.

여기서 뭔가 기시감을 느끼는 독자가 있을 듯하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한국 정치에서도 봤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우세력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독재라고 했다. 중국인 입국을 막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정부가 중국식 전체주의를 지향한다고도 주장했다. 보수정치는 문재인 정권 시기부터 아예 정부가 주도하는 모든 정책을 ‘사회주의 독재’로 규정했다. 이후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전직 대통령 윤석열은 ‘독재’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문재인 정권과 대립한 자신을 ‘자유민주주의자’로 포장해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윤석열이 스스로 몰락하고 사법 처리되는 과정에 있는 지금도 보수정치는 같은 시도를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기-승-전-이재명 독재’ 서사가 이를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극우정치는 이른바 진보세력 혹은 진보 정권이 중국 정부와 사실상 공모해 부정선거로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민자에 대한 독일 극우정치의 태도와 유사한 맥락에 있는 관점이다.

한국 보수정치가 서구의 극우정치와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된 과정은 어떤 것일까? 일부러 전략적 벤치마킹을 한 것일까? 물론 그런 면이 있지만, 결국 사람들을 동원하기 쉬운 해법을 찾는 시도가 궁극적으로 극우포퓰리즘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의도대로 작동하는 전략만 남기다보니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극우포퓰리즘이라는 해법만 남게 되었다는 얘기다. 정치적 용불용설이랄까?

 

주류 정치에 대한 반감,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왜 포퓰리즘과 결합한 극우정치의 시도에 쉽게 포섭될까? 그것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해결을 약속하는, ‘믿음직한’ 정치세력이 극우정치뿐이기 때문이다. 설명과 약속은 주류 정치도 한다. 하지만 극우정치 지지자들은 주류 정치가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들을 속여왔다고 생각한다. 실제 문제는 오랜 세월 해결되지 않아왔다!

AfD의 지지 기반이 되는 곳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옛 동독 지역이다. 여기서 경제적으로 낙후했다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애초에 주류 엘리트에 대한 믿음이 저조한 이 지역 유권자들이 체제에 의해 굴욕을 강요받는다고 느낀다는 게 중요하다. 극우정치는 그 기분이 사실임을 인정하면서, 이 지역 유권자가 다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여러 방식을 동원해 역설한다. 이에 따라 유권자는 정치·사회·경제에 걸친 ‘인정’을 쟁취하기 위해 극우정치의 방법론을 인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나타났던 ‘태극기 부대’를 비슷한 틀로 볼 수 있다. 주로 고령층 보수 유권자로 구성된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서 자신들이 믿고 고수해온 산업화 시대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했다. 그것은 ‘인정’의 상실이었으며 역시 굴욕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극기 부대는 그렇게 잃어버린 인정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거리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상황에 대해선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올공 시위’에서 보듯, 극우정치 지지자들을 거리로 나서게 하는 것은 그들만의 대의명분이다. 참정권이 훼손된 상황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자고 하는 주장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 문제는 극우정치의 시도는 이 대의명분을 참칭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극우정치는 참정권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자격이 없는 이들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 출신의 귀화한 이민자와 참정권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매칭이 안 되는 이유도 이것이다. 극우정치가 결론적으로 가진 자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참정권 보장이든 자유민주주의 실현이든, 이 경우의 대의명분은 허울 좋은 포장지로만 기능한다.

어찌됐든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하고자 하는, 즉 대의명분에 따르려는 대중의 욕망에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보가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거짓 명분으로, 사익 추구를 위한 핑계로, ‘내로남불’로 찍혀 있기에 선택지가 아닐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초 선택지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각자도생의 해법이라도 추구하려는 것이고, 극우정치의 대의명분 참칭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극우정치를 선택하게 되는 게 오늘날의 풍경이다. ‘삼전닉스’ 주가의 등락으로 전락한 경제 및 산업 정책과 인터넷·유튜브가 추동하는 오로지 ‘나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지는 파편화된 세계 인식, 밈과 팬덤의 문법 및 행동양식으로 대체되는 현실 정치가 이런 ‘대환장 파티’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다를 거라 장담 못하는 이유

 

탈출구는 주류 엘리트 정치 또는 대안적 진보 정치가 신뢰받는 대의명분의 정치를 다시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오직 자기 이익만을 기만적으로 주장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억울함을 피력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무너지는 방화벽을 보면서 불길이 이쪽으로 번지는 일을 계속 걱정하게 되는 건 이런 이유다. 과연 우리는 다른 운명을 쟁취할 수 있을까?

 

김민하 정치평론가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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