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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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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걸어나올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가능성이 희박한 시대… 그럼에도 이야기함으로써 길어올리는 희망
등록 2025-04-04 22:52 수정 2025-04-11 09:11
고통과 폭력의 서사 한가운데서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구할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신부님에게 도움을 받은 뒤,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지내는 장발장과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UPI코리아 제공

고통과 폭력의 서사 한가운데서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구할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신부님에게 도움을 받은 뒤,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지내는 장발장과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UPI코리아 제공


 

가끔 현재 청년들이 겪는 절망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가면 발끈하는 나이 든 청중이 있다. 지금 청년들이 이전 세대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명백한 과장이며 엄살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탄압이 이전보다 심하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도 않다, 문화적 자원이 빈약한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권위적인 것도 아닌데 뭐가 더 어렵냐는 것이다. 어렵지도 않은데 절망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한다.

청년들의 절망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꼰대’의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런 말을 하는 분들이 그냥 ‘꼰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나 곤혹감을 토로하는 예도 있다. 그 곤혹감을 찬찬히 뜯어보면 꽤 흥미로운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절망감을 주로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고문을 받아 죽을 만큼 어렵지 않은데 절망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물론 현재 청년들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에서, 특히 노년층에서 과거보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더 힘들어진 계층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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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사실 먹고살 만한 중년층도 같은 말을 하곤 하지 않는가? 과거보다 살림살이는 훨씬 나아졌는데 과거보다 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거꾸로 본다면 그 어려웠던 시절이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나 ‘응답하라 1988’처럼 더 ‘낭만적’으로 보이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더 ‘성숙해’ 보이는 것은 그냥 과거를 윤색해서 바라보기 때문인 노스탤지어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절망’이라는 말 속에 있는 것일까?

학생들이 자전적 경험에 기초하여 작품 초안을 잡아 오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글의 주인공들이 작품 안에서 겪는 사건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친족 성폭력을 포함한 성폭력에서부터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과 고립, 가족폭력과 무관심, 방치, 그리고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찾아오게 된 극심한 가난 등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질 만한 일인가 싶은 내용이다. 설혹 벌어지더라도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완벽하게 방치돼 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국가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몇몇 학생의 이야기를 종합해 학교폭력의 예를 들어보자. 잘사는 집이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일로 바쁘다. 이미 이들 사이에 실질적인 애정이라는 것은 파탄이 났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연극적’이다. 학교에서 그는 수시로 폭력에 노출된다. 운동장을 걷다가도 그를 타깃으로 삼은 공이 날아온다. 쓰레기통이 머리에 씌워지기도 하고 옷이 찢기기도 한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가 학급에서 따돌림과 조롱, 그리고 폭력을 당하는 동안 모두가 외면하거나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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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을 ‘경험’

이들이 쓴 글을 보면 폭력의 서사 한가운데 희미하게 딱 한 줄이라도 존재해야 하는 인간의 가능성에 관한 사건 혹은 서사가 없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그리고 있는 ‘가능성’ 말이다. 가톨릭 사회인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수도원의 위세에 눌려 모두가 그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소녀들에 대한 착취를 외면하고 강요할 때, 주인공 펄롱은 과거에 한 부인이 자신에게 베푼 친절이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음을 떠올리며 소녀의 손을 잡는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간이란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본다. 단 한 명, 용기를 내는 펄롱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는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다.

폭력에 관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내 경험을 떠올렸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응답하라 1988’ 세대인 나도 학교폭력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같은 반에 폭력적인 ‘놈’이 있었는데 그가 내 가방에 달린 장식품을 달라고 했다. 싫다고 몇 번이나 거부했고 어느 날 그 장식품이 없어졌다. 그놈에게 혹시 가져갔으면 달라고 하자 곧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명치에 그대로 꽂힌 주먹과 함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에서는 거품이 나왔다. 고꾸라지고 있을 때 그놈의 뒤에서 한 친구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지!”

철수였다. 철수는 우리 반의 중심이었다. 집이 아주 잘사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아주 센 것도 아니지만 그는 우리 반의 중심이었다. 청소년에게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수는 덕이 많았다. 잘살거나 못살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힘이 세거나 약하거나, 대다수 반 아이들이 철수를 ‘존중’했다. 그래서 “그만하지”라는 그 말에는 힘이 넘쳤다. 놈은 주춤하더니 나에게 “재수 좋은 줄 알아라, 새끼야. 철수 아니었으면 너는 디졌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이런 게 깜깜한 폭력의 한가운데 딱 한 줄기로 존재하는 구원 가능성의 서사다. 내가 다닌 학창 시절은 폭력의 빈도와 강도로 보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몇몇 교사는 학생들에게 몽둥이찜질을 했고, 중학교 선도부는 심심하면 후배들을 집단으로 때렸고 어느 반에나 존재하던 깡패는 힘없고 가난한 친구들을 뜯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어디에든 철수 같은 존재가 있었다. 때로 그 철수는 교사였고, 친구였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인 때도 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두운 시대라고 하더라도 곁에 철수 같은 존재를 두었던 경험은 인간을 버틸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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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에게서 내 목숨을 구원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철수를 통해 경험한 것은 인간의 가능성이다.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버려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손을 내미는 존재가 인간일 수 있다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이 가능성을 본 사람은 쉽게 절망할 수가 없다. 무수히 많은 실망과 절망이 존재하는 현실이지만 그 경험이 인간의 구원 가능성으로 마음에 박혀 북극성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왜 죽지 않았을까

반대로 말하면 무엇보다 큰 절망은 바로 인간에 대한 절망이다.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가능성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무엇보다 절망한다. 학생들의 글에 등장하는 폭력의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그런 절망이다. 아무도 나를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는 절망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구원받을 가치가 없다는 절망이 된다. 그 절망 앞에서 모든 도덕과 윤리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주인공은 무슨 짓이든 해도 되고, 그 모든 짓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으며, 느낄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이런 일을 당하고, 이 정도의 절망감에 빠져, 모든 도덕과 윤리적 감각에서 해제된 주인공이 왜 죽지 않느냐고 말이다. 절망이 실존적 죽음이라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존적 죽음 앞에서 자기 죽음이나, 혹은 세계의 죽음을 택한다. 그런데 왜 죽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저 목숨이 모질어서 죽지 않는 것일 뿐이면 그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이 죽지 않는 이유를 찾아보라고 말한다. 반드시 있다고. 구원의 사건/서사가 없이 폭력의 서사만으로 사람은 말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창작자로서 이 끔찍한 폭력과 절망의 이야기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거기에 어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 없이 말을 꺼냈을 리가 없으니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한 말이다. 이글턴은 저서 ‘비극’에서 사람이 말한다는 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해방이라고 말한다. 고통에 종속돼 있다가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기에 고통으로부터 해방됐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말함으로써 고통이나 재앙이 주인공이 아니라, 말하는 고통의 당사자가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재앙에 침묵하지 않음으로써 ‘더는 말할 수 없을 때’라는 의미에서의 절망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창작자로서 말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절망으로부터 해방됐음을 의미하니 반드시 죽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한 그 가능성의 사건/서사를 찾는 것이 이제는 창작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그것을 못 찾으면 주인공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이고, 죽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고 알려준다.

그러면 비로소 학생들은 자기가 그저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그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자기와 같은 폭력을 지금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 폭력을 당했을 때 세상천지에 자기 혼자만 이런 폭력을 당한 것인 줄 알고 외롭고 무서웠던 그때를 떠올린다. 그때 누군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며, 그때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 글을 쓰기로 했다고 명료하게 말한다. 극심한 폭력과 고통을 당한 이가 글로 다른 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구원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고통을 이야기하는 ‘처음의 마음’

이것은 “저는 이 글을 다 쓰고 죽으려고 했습니다”(실제로 학생이 한 말이다)가 “저는 이 글을 다 쓰기 전에는 죽을 수 없습니다”(실제로 학생들에게 저 말을 어떻게 해서 이야기의 초입으로 만드는지 말하며 들려준 말이다)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 전환이 일어나면 이야기 안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 또한 절망뿐인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주인공이 된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쓰고 죽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가 들을 만한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 것을 선택한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기일이 정해졌다. 이 글이 발간됐을 때는 이미 결과도 나왔을 것이다.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구원 혹은 절망이 아니다. 전 대검 감찰부장 한동수 변호사의 말처럼 악은 평범하지만 동시에 집요하고 성실하다. 악의 진부함과 집요함, 성실함이 만든 ‘지체된 정의'에 많은 시민이 지쳤다. 그러나 꾸준히 철수가 되어주는 분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결과를 뚫고 완전히 망한 것만이 아니며 여전히 인간에겐 가능성이 있다는 서사를 이어간다. 아무리 어둡더라도 철수들에게 또다시 철수가 나타나는 그 구원의 서사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테리 이글턴이 쓴 책 ‘비극’

테리 이글턴이 쓴 책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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